31
7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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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 평론의 허와 실: 허구적 프레임과 결핍에 대하여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VS 동아시아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조영일 씨의 평론을 재론함에 앞서, 먼저 세계문학비교학회에 실렸던 부산외국어대학교 박상진 교수의 『동아시아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해석을 통한 보편적 문학가치의 지향』이라는 논문을 인용해본다.

“‘동아시아 문학’은 ‘동아시아’와 ‘문학’의 두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을 단순히 가로지른다기보다는, 그들이 흩어지고 서로 합쳐지기를 반복하여 끊임없이 맥락에 따라 변이하는 하나의 지속적 과정이다. 우선 ‘동아시아’란 무엇인가, 즉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상상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이 자기부정과 저항, 그리고 개인 주체의 공감 위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건설된다고 보았다. 그렇게 건설된 동아시아, 그리고 그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는 근대적 내셔널리즘이 강요하는 폐쇄적 동일화와 그로 인해 개인 주체들이 ‘국민’으로 집단화되고 동질화되는 상황으로부터 비판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역사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주체로 설 수 있다. ‘동아시아 문학’은 그러한 ‘동아시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문학’ 공동체의 방향을 설정하자는 화두에 닿아있다.”

재미있게도 두 글의 제목은 매우 유사하지만, 논지전개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박상진 교수의 글에 조영일 씨의 평론을 대입해보자면, “‘장르문학’은 ‘장르’와 ‘문학’의 두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장르’란 무엇인가, 즉 장르의 정체성을 상상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 ‘장르문학’은 그러한 ‘장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문학’ 공동체의 방향을 설정하자는 화두에 닿아있다.”
박상진 교수가 앞선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상상하는 작업을 선행하고 그 후에 ‘동아시아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해, 조영일 씨는 ‘장르’의 정체성을 모르겠다고 밝힌 후에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기반의 차이는 글의 논지전개가 지닌 힘을 현저히 차이 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문학’에 대한 이해만으로 ‘동아시아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문학’에 대한 이해만으로 ‘장르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의 문제다. 재차 대입하자면, “‘장르문학’은 그러한 ‘장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문학’ 공동체의 방향을 설정하자는 화두에 닿아있다.”

 

논점의 일탈

박가분 님의 글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글이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의 논점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가분 님이 예시로 들었던 칸트의 비평에서 우리는 칸트가 ‘내적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영일 씨의 평론을 보았을 때 장르 팬덤은 그가 ‘내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를 보자.

당연하게도 평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문학’을 놓고 문단문학과 대중문학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의 장르문학이 대중문학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의 장르문학과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략) 실제비평은 아예 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론비평의 실제적 예시는 장르문학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해외문학계도, ‘현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8~90년대도 아닌, 광복 이전의 한국 ‘근대문학계’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근대의 한국 대중문학이 21세기의 장르문학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조영일 씨의 평론이 ‘사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의 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언급한, 그리고 박가분 님이 재언급한 ‘한국에서 (장르문학/비-문단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장르/비-문단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미학적 가치체계와 지향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지향점이 현재 어떠한 가능성 혹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어떠한 예술을 긍정하면서, 실제적 발현을 고려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분석하여 옹호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조영일 씨의 논리 자체가 ‘관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반)문단주의
바로 이 지점에서 조영일 씨의 비(반)문단주의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조영일 씨는 경쟁에서 ‘좋은 문학’이 살아남는 구조가 되지 못하고 실체보다 과잉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문단을 향해 공격하지만, 그 반대급부에 놓고 있는 ‘비-문단문학’, 특히 『판타스틱』에서 그의 글 제목을 장식한 ‘장르문학’은 과연 그러한 경쟁체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과연 한국문학에서 비-문단문학이 문단문학보다 훨씬 엄격하고 올바른 잣대를 통해 걸러져서 독자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을까?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문단문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본적 글쓰기 능력의 부족함을 손쉽게 변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비-문단문학이 문단문학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문단문학보다 훨씬 다양한 미학적 가치체계를 구축해야 함은 물론, 조영일 씨의 논리대로라면 현재의 문단문학보다 더욱 엄격한 검증체계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놓고 보자면, 다양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국내는 물론 해외의 다양한 사례와 이론들을 연구하고 이를 ‘기계적인 이론적용’이 아니라 체화하여 활용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론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생물학과 신학의 예

앞서 나는 ‘어떠한 예술을 긍정하면서, 실제적 발현을 고려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분석하여 옹호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론이 그 자체로 내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의 문제에 대해서, 생물학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진화론이 맞다’와 ‘진화가 옳다’는 다른 지평의 문제이다. 진화론은 계통이 다양하게 분화하고 변화하면서 현재의 생태계를 형성하였다는 주장이고, 이는 현재 의심할 여지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화가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자 ‘실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양한 ‘가치’를 기반으로 한 반례를 통해 이 명제는 반박될 수 있다. 진화의 경향성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항상 옳은 결론을 낳지 않는다는 사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큰뿔사슴의 멸종이다. 큰뿔사슴의 암컷은 건강함을 판단하는 척도인 뿔 크기를 비교하여 수컷을 선택했고, 그 결과 작은 뿔을 지닌 사슴은 도태되어 뿔 크기의 다양성을 잃어버린 채 더욱 큰 뿔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결국 포식자와 생태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로까지 진화한 큰뿔사슴은 멸종하게 되었다.

종교의 예를 들어볼까. 성결교회 박영식 목사의 말을 인용해보자.

“19세기를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은 당시 교회와 사회, 문화, 정치계, 학계 등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신학사상은 소위 <전쟁신학>으로 이어졌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구절을 통해 히틀러가 불러일으킨 전쟁을 신앙적으로 지지했고, 이들의 <문화신학>은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반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회의 흐름에 대해 침묵하고 동조하는 무비판적인 신학을 양산했다.”

‘진화론이 맞는다고 해서 진화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바꿔서, ‘이론비평이 내적 정합성을 가진다고 해서 그 이론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자. 혹은, ‘어떠한 (신학이든 이론비평이든)사상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해서 그 사상의 발현이 항상 옳은 식으로 이루어질까’를 생각해보자.
사실 생물학과 신학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문학계에서 이와 같은 질문에 쉽게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십 차례 증명되었다. 박가분 님이 예시로 들었던 칸트만 하더라도, 가라타니 고진의 재해석 이전에 칸트의 철학이 어떠한 실제적 발현양상을 보여 왔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이론비평’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지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선뜻 내놓을 수 있을 만큼, 현재의 ‘이론비평’이 힘을 가지고 있을까. ‘필연적 객관성’이라는 ‘예언가적 기질’은, 어떠한 ‘이론’이 옳게 발현되는 ‘실제’의 문제, 현상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역사적으로 되풀이하여 목도해왔다. 그리고 ‘옳은 이론’에서 출발한 사상이 얼마나 기괴하고 끔찍한 키메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비극적 사실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실제적인 양상이 부정적이라면 ‘이론비평’을 통해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발생하는 지점을 지적하여야 할 것이고, 실제 긍정적 사례나 양상을 발견했을 경우라면 이론적으로 실제 상황이 미학적으로 어떠한 의미에서 긍정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론비평’이 그 자체적인 기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와 연관을 시키지 못하는 ‘이론비평’이 현실세계에서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
―『판타스틱』 독자의 불행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에서 나는 조영일 씨의 평론을 ‘사기’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어떻게’라는 부분이어야 함에도,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천착할 뿐 정작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환상문학을 읽고 있는 『판타스틱』 독자에게, 위의 문장에서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비평’의 문제, 혹은 그동안 ‘대중문학’이 지녔던 ‘가능성’ 자체나, (박가분 님의 표현대로라면) ‘문외한’이 일방적으로 장르문학에 대해 내리는 ‘위치지음’의 문제는,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시효가 지났거나 현재 상황에 유효하지 않은 문제의식이다. 『판타스틱』이라는 ‘장르문학 잡지’에 실릴 비평이라면 마땅히 현재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환상문학에 어느 정도의 ‘위치지음’이 정당하고 가능한 것인지, 또는 어느 정도, 어떠한 방향성의 ‘가능성’이 엿보이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함이 마땅하다. 만약 이것이 회의해야 하거나 (조영일 씨의 글처럼)새롭게 증명해야 할 문제라면, 『판타스틱』이 그동안 이 문제를 실제적으로 증명할 만한 성과를 전혀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장르문학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언어로 ‘이론비평’을 해왔던 것도 이미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다시 말해, ‘이론비평’으로 ‘증명’해내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어떻게’의 문제는 실제비평을 통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고 현재 유효하고 필요한 비평은 바로 실제비평이라는 것이다. 장르문학 잡지가 창간된 지 햇수로 3년이 된 마당에, 스스로의 지향점에 대한 이론적 가능성의 문제, 여전히 ‘가능한가’라는 ‘가능조건’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동안 『판타스틱』이 해왔던 일들이, 장르문학이 ‘가능한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증명해주지 못했다는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판타스틱』의 독자들은 『판타스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헷갈려해야 할까? 잡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잡지 스스로 하고 나서 독자들에게 잡지의 수록된 글로 ‘해답’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판타스틱』은 그 당연하고 기본적인 문제에도 3년간 ‘해답’을 내릴 만한 ‘한국 장르문학’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고민’은 사전적 의미의 고민이 아니다. 『판타스틱』을 읽고 나면 당연히 들 수밖에 없는, 정체성과 가능성에 대해 뚜렷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여전히 ‘가능증명’이 아닌 ‘가능조건’에 머물러있을 수밖에 없는 『판타스틱』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나는 조영일 씨의 글을 실효적이지 않은, 글의 제목을 볼 때 마땅히 품었어야 할 문제의식을 애써 외면한 채 ‘가능(할 것이다)’만을 외치는 ‘사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온한 프레임
―인디음악과 장르문학, ‘문화’와 ‘비평’, 그리고 ‘문화평론’

박가분님은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와 「작가지망생들이여 홍대 앞을 보라」라는 칼럼을 무리하게 동일한 프레임 하에 엮어내고 있으나, 그 두 필자가 한국 장르문학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혹은 오해하고 있다.(두 필자가 다른 시각을 지녔다는 점은, 두 기사가 거울의 필진들에게서 상당히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박가분님은, ‘아이돌 팬덤에 의한 소비자 운동’이라는 상당히 안일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글(공교롭게도 박가분님이 예로 들었던 글은 내가 이 글의 필자와 대화하며 실제적 문제점을 차근차근 짚어내고 필자가 이를 자신의 기준에 맞게 수용하여 직접 수정했던 글이다)을 예시로 들어 한국 인디음악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인디음악을 예로 들면서도 ‘현실적’으로 한국 인디‘음악’이 ‘음악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회피하고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한국 장르‘문학’이 ‘문학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박가분님 글의 ‘구조적 문제’이다. 한국 인디음악을 ‘아이돌 팬덤’, ‘록페스티벌’이라는 특정 소비자군(群)의 ‘자본주의적 문제’로 손쉽게 치환하며 문제의 포커스를 ‘문화’에서 ‘산업’으로 교묘하게 돌리는 것은, 한국 인디음악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중심’이어야 할 ‘음악’을 오히려 주변부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광경은 ‘문화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문화 자체에 대한 숙고와 고려 없이 사회현상적인 부분만을 텍스트 삼아 기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읽어내는 TV 속의 문화평론가 인터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렇듯 해당 장르가 낳은 다양한 예술작품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이론비평’은 결국 ‘문학(음악)비평’에서 애써 ‘문학(음악)’을 지우고 ‘문화’로 은근슬쩍 뭉뚱그리거나 ‘사회’를 덧씌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음악비평, ‘문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문학비평은 필연적으로 예술이 지녀야 할 미학적 방향성의 비전을 잃은 채 자신의 사회적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를 주변부화하여 도구로 끌어들인다.
이렇듯, 철저한 ‘수용자’, ‘소비자’, ‘문화향유자’, 혹은 ‘문화평론가’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이론비평’은 결과적으로 ‘작가’의 실종, ‘작가’의 소실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귀결된다. ‘작가’보다는 작가로 하여금 이러한 글을 쓰게 만든 ‘사회적 원인’을 추적하는 것, ‘작품’보다는 그 작품이 그러한 위치에 서게 된 ‘사회적 배경’의 타당함을 따지는 것, 학창 시절에도 지금도 어디서 많이 보아온 풍경일 것이다. 조영일 씨의 ‘이론비평’은, 바로 이러한 ‘위치지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프레임’인 것이다.

다시금, “역사적으로 ‘문학’과 ‘음악’은 어떠한 방식으로 향유되고 창작되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장르문학을 찾아 읽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정당한가.

작가들은 정당한 이유에 입각하여 장르문학을 쓰고 있는가.

현재 장르문학의 향유와 창작은 건강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문제시 될만한 부분, 간과되는 부분은 없는가.

 

‘문외한’의 비평은 얼마만큼 유의미한가?

탈식민문학 시대 이후 장르문학이 전세계적으로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도, 또한 그러한 작품들이 꾸준히 번역되었음에도 여전히 ‘가능조건’을 따지고 있는 것은 결국 한국 장르문학에서 ‘가능조건’을 말하는 수준 이상의, ‘가능증명’을 보여준 예가 문학에서도 문학비평에서도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에서 ‘외국의 비평 수입’이나 ‘전문 비평가 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조건’이라는 측면에서 문단문학의 ‘견제자’라는 프레임에 갇힌 ‘비문단문학’ 속의 장르문학을 꺼내어, 실질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론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외국 제3세계문학의 실제적 예가 풍부하게 존재함에도 이러한 ‘가능증명’을 방치한 채 ‘가능조건’만을 타진하고 있는 현재의 답보 상황에서 탈피하는 데에는, 실제적으로 ‘가능증명’을 보여준 해외의 작품과 비평론을 보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가능증명’의 비평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문화평론가’적 ‘이론비평’에 만족하고 머무를 때에 박가분 님이 주장하는 ‘오타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이는 해외의 조류와 단절된 채 자족적 세계에 머물렀던 한국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뽀롱뽀롱 뽀로로』를 낳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하지 않아도 될 ‘맨 땅에 헤딩하기’를 겪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 문제가 이론적 토대의 위에서 실제비평을 통한 치열한 방법론적 논의가 진행되지 않은 채 박가분님이 이야기하는 식의 ‘이론비평’에 머물렀던, 한국 만화/애니메이션 담론의 부실함이 파국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여 발생한 비극적인 실례라고 보고 있다)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리뷰에서 외국 비평의 예로 들었던, 캐나다 SF작가(올해 그는 존 캠벨Jr. 기념상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이자 한국 SF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드 셀러(Gord Sellar)의 평론 Optimism in Literature around the World, and SF in particular, part 3: SF in South Korea today는 한국 SF의 허와 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기사로, 다양한 SF 출판사와 관련 웹진, 커뮤니티 등의 속성과 한국 창작 SF들의 특징 및 가능성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세심하게 분류하여 정리해낸 글이다. 이러한 글은 직접 발로 뛰고 관련서적을 읽고 해외와 국내 장르문학 역사의 공통점과 차이점, 해외 장르문학 비평이론과 한국의 실제적 상황을 명민하게 분석하여 나름의 시각과 현실해석을 구축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글이다. 안타깝지만, 아직 한국 국적의 평론가 중에서는 이 정도의 애정 어린 정성으로 취재하고 분석하여 글을 쓰는 평론가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판타스틱』이 해외 장르문학을 싣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종류의 해외 장르비평을 싣는 것은 우리 문학의 지평과 다양성을 넓히는 수많은 방법론 중 하나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당연하게도 해외 비평과 이론에 대한 소개는 ‘세계문학’적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었던 한국문학이 풀어가야 할 숙제이며, 이에 대한 비판적 수용과 함께 한국의 독자적인 문학비평체계를 구축하는 일 또한 이와 병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외국의 비평 수입’이나 ‘전문 비평가 양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그저 ‘외국 장르비평 번역 활성화 주장’으로 읽힌다면 심각한 ‘오독’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실제로 조영일 씨나 박가분 님이 글에서 인용하는 학자들은 외국의 학자들이며, 현재 20세기 이전의 한국문학과 관련한 최신 연구, 고서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오히려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논하는 작업은 문단문학에 가까운 ‘국문학자’들이 하고 있고, 비-문단문학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프레임을 넘어서
―누구를 위하여 장르문학은 봉사하나

현재의 문단문학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점점 실제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현상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은 거의 탈근대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 하지만 한국(문학) 속에서 발현되는 근대와 탈근대의 혼재를 여타의 제3세계 문학처럼 제대로 엮어내고, 이를 풀이해낼 수 있는 작가/평론가가 부재하다. ‘세계문학’을 부르짖지만, 정작 세계문학이 어떠한 발전양상을 보여 왔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론비평’의 지평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뿐이다. 어쩌면 이들이 말하는 ‘세계문학’은 상징적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과연 조영일 씨와 박가분 님을 비롯한 비평가들이 ‘세계문학’에 대해서 얼마만큼 연구와 비평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연구 결과가 한국문학 작가와 독자들에게 얼마나 흡수되고 있는가.

문단문학이라는 시스템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시스템에 정면 도전할 수 있는 ‘이론’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연구되고, 작품을 통해 발현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
비-문단문학은 문단문학의 무지와 오해를 비웃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러한 비웃음이 그저 비웃음에 그칠 뿐, 비-문단문학 또한 문단문학과 마찬가지로 ‘실제’와 ‘이론’을 엮어내며 발전해나가지 못하는 절름발이 상황이라는 점이다. 양측 다 서로의 무지를 비웃지만, 실은 양측 다 무력하기 때문에 애써 이러한 결핍을 감추고 상대를 향해 비수를 날리며 상대가 먼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인 것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허구적 프레임을 두고 허구적 프레임의 ‘필연적 객관성’이나 ‘실제적 영향력’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동아시아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인용해보자.

“내셔널리즘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해 봉사하느냐에 따라 내셔널리즘의 상징들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창조될 수 있다. 이 창조의 과정에는 사실을 조작하고 국가의 역사적·문화적 유산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한편에 이에 대한 저항적 해석들(counter-interpretations)이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인용문을 우리가 논하는 장르문학으로 바꿔보자면, “장르문학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해 봉사하느냐에 따라 장르문학의 상징들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창조될 수 있다. 이 창조의 과정에는 사실을 조작하고 장르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한편에 이에 대한 저항적 해석들이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개념이나 프레임, 혹은 구조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조작과 선택적 기억, 망각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게 만든다. 이에 대한 저항적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장르문학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해 봉사하느냐”의 문제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르문학이 ‘비-문단문학’의 인기 있는 한 부류로써 ‘쓸모 있는 도구’로만 인식된다면, 조영일씨의 평론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장르문학이 어떠한 부류의 대척점이나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미적 가치를 창출하고 문화를 꽃피우려면, 조영일 씨의 평론은 별 의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허구적 프레임이 걸림돌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장르문학이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해 봉사하느냐”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조영일 씨의 평론에서 장르문학을 해석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그 주체는 장르문학을 ‘이론비평’하기에 앞서 “‘장르’와 ‘장르문학’의 정체성을 상상하는 작업”, 그리고 그 실제적 상황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는가.
또한, 장르문학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도록 유도하는가.

내 대답은, 회의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200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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