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6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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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머리말: 『판타스틱』 봄호의 희망, 『판타스틱』 여름호의 실패

『판타스틱』 창간호부터 여름호까지 꾸준하게 정기구독을 해왔다. 그리고 매달 받아 읽으면서 꾸준하게 실망해왔다. 유일하게 실망의 범위를 벗어났던 것이 지난 봄호였다. 김내성 100주년 특집은 기존의 특집 기사와 에세이에서 월등히 나아졌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기대를 걸 만한 편집진의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름호를 꼼꼼하게 읽고 난 지금 남은 것은 실망뿐이다. 여름호의 시도는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에세이의 문제: 독자 배려와 방향성의 문제

봄호의 연장선상에 있는 두 에세이 「저승에서 온 소환장: 중세 중국인의 생과 사」와 「아서 왕 전설」은 봄호의 미덕을 계승하고 있다. 여름호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나마도 봄호와 비교해서 신선도나 정제수준은 퇴보 혹은 답보상태인 듯하다. 「저승에서 온 소환장: 중세 중국인의 생과 사」는 일반인들이 흔히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보여주며 중세 중국인들이 생각한 저승의 모습을 실제 중국 고대-중세의 변천사와 비교하고 풍부한 예시로써 세밀한 저승관을 그려내고 있지만, 예시의 비중이 높고 분량이 길며 설명 중간 중간에 예시문이 계속 끼어들어가면서 몰입이 끊기는 면이 있어 중국사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글의 집중도나 흐름을 따라가기 버겁다. 이는 처음부터 전체적인 글의 밑그림을 그려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대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고자 하는 글쓴이의 의도에 의한 것이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부분이다. 『판타스틱』의 모든 독자가 책에 실린 글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는 독자라면 상관없겠지만, 40쪽이 넘는 전문적인 내용의 에세이를 실을 때에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글의 질적 측면에서는 테드 창과 로버트 하워드의 소설 다음으로 가치 있는 내용이지만, 좋은 글을 싣는 것과 좋은 글을 ‘읽기 좋게’ 싣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는 편집진의 몫이다. 원고 텍스트 파일을 그대로 교정 교열하여 흑백 인쇄로 찍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독자들이 보다 더 쉽게, 독자들에게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인력 부족으로 인한 문제라고 넘어가기에는, 기본적인 성의와 사소한 배려의 문제다.

상대적으로 「아서 왕 전설」은 일단 앞에 실린 에세이에 비해 감흥이 적었다. 이미 『아발론 연대기』(장 마르칼, 북스피어, 2005년 12월) 등의 책 이전에도 아서 왕 전설에 관한 개략적인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책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아니, 책을 뒤질 필요도 없이 영문 위키피디아만 검색해보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정보의 양이나 신선도보다는 정보를 어떻게 직조하고 해석해내는가 이다. 「아서 왕 전설」 에세이가 취하는 것은 가장 널리 알려진 중세 이야기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론이다. 이런 이론적 토대는 사실 아서 왕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관련된 글을 찾아봤다면 알고 있을 내용이다. 기본적인 소개도 좋지만, 정말 제대로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면 문화사적 맥락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외삼촌-조카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식의 맥락적 서술보다는 ‘왜 고결하다는 이미지를 지닌 기사들의 막장 불륜담이 그 시대에 인기를 끌었는가, 그들은 정말 막장이었는가, 금기를 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 불륜 연애담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사회문화적 설명이 뒷받침되는 것이 중세의 이야기 문화와 그 흐름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이 누락된 것은 「아서 왕 전설」을 ‘이야기’에 한정하여 다루려 했기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장르 평론의 부재와 ‘장르 사기’

조영일 씨의 ‘평론’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문단문학 쪽에서 그가 이야기해왔던 것의 답습이었다. 혹자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다. 21세기 장르 잡지에 프로 문학을 이야기하는 대범한 시대착오는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장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평론’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소위 장르문학이라는 것의 미학(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먼저 장르문학에 대해서 배우고 나서, 장르문학이 정말 한국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조영일 씨는 자신이 장르문학에 무지하다는 점을 밝히면서 글을 시작한다. 자신이 장르문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대뜸 ‘평론’ 을 맡았다는 건, 스스로 자격도 능력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단지 청탁이 들어와서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게재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이유로 글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당연하게도 평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문학’을 놓고 문단문학과 대중문학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의 장르문학이 대중문학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의 장르문학과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과거 대중문학의 특징과 상황=현재 장르문학의 특징과 상황”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때에만 타당하다. 하지만 과연 이 공식이 성립하는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 ‘장르문학=대중문학?’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제 문단 작품과 대중문학 작품과 장르 작품에 대한 비교평가(실제비평)와 함께 다양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이론적 틀에 입각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논평(이론비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실제비평은 아예 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론비평의 실제적 예시는 장르문학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해외문학계도, ‘현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8~90년대도 아닌, 광복 이전의 한국 ‘근대문학계’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근대의 한국 대중문학이 21세기의 장르문학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박상륭, 서정인, 오정희, 이외수 등과 같은 작가들이 주목 받는 이유나, 조세희, 최인훈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 가치가 없거나 독자의 자발적 선택을 받지 못할 만큼 떨어지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비평을 통해 이야기하지도 못했다. 최인훈은 벌써 예전에 외국으로 번역 소개되어 호평 받았고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그 가치를 몇 마디 말로 무시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검증이 된 상태이며, 조세희는 단지 문학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수능 특수와 엄청난 광고세례에 힘입어 그야말로 ‘학생들의 교과서’가 된 이문열 평역 『삼국지』(이문열, 민음사, 1988년 5월)가 최근에 145쇄를 돌파했는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이성과힘, 2000년 7월)은 이미 200쇄를 돌파한지 한참 지났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문구, 문학과지성사, 2000년 2월)이 30쇄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히 교과서 때문이라고 치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과연 이 글이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 평론은 현재의 문단문학과 대중문학에 대한 글일 뿐, ‘장르문학’에 대한 글이 될 수 없다. 90년대 이후 장르문학이 발전해온 과정은 근대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해외와 우리나라의 상황도 지금과는 천지 차이다. 수시로 유행이 바뀌는 번역문학이야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조영일 씨의 글은 장르평론이 될 수 없으며, 장르문학 잡지에서 장르평론이 아닌 대중문학평론을 실으며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한다는 것은 사기 행위에 가깝다.

현재 문단에서 장르문학에 대해 제대로 평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 쪽에서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장르 평론’을 싣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사기’를 칠 것이 아니라 한국 장르문학평론계의 부재를 겸허히 인정하고 장르문학 평론가를 키워 내거나, 해외 평론계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미 Optimismin Literature around the World, and SF in particular, part3: SF in South Korea today와 같은 시도가 존재한다. 해외의 웹진에 접촉하여 청탁한다면 원고료와 번역료를 두 번 지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평론가들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내실 있는 평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처럼 한국의 장르문학에 대해 모르면서 자신이 배운 그대로 이론적인 평론을 기계적으로 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혹평하긴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그동안 『판타스틱』이 문화지라는 이름 하에 존재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회피가 가능했지만, 문학지를 표방하였다면 절대로 평론을 빠뜨릴 수 없다. 평론 없는 문화지는 존재할 수 있어도 평론 없는 문학지는 존재할 수 없다. 평론은 엄연히 문학의 한 갈래이고, 또한 문학지가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와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장르문학에 대한 평론이 부재하고, 장르문학의 장르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 하에서 장르문학지를 표방하는 『판타스틱』의 역할은 장르문학이 지닌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비평과 평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최신 장르문학에 대한 소개나 장르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는 영화잡지나 패션잡지에서도 충분히 다룰 수 있고, 이미 몇몇 잡지에서는 기사를 싣고 있다.

 

고질적 문제의 재발: 90년대적 기획력의 문제

이런 면에서 수필 「나의 공포체험 특집」이나 편집위원 김봉석 씨의 에세이 「사람들은 어째서 근심걱정을 버리고 공포물을 즐기는가?」, 토크 「레진 VS 쿄코, 두 스타블로거의 솔직화끈 토크」, 카툰 「책 소개하는 만화」와 같은 기획은 패션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안이한 기획물들이다. 수필 「나의 공포체험 특집」은 그나마 장르소설 작가들을 기용하여 읽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좋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말 그대로 딱 ‘나의 공포체험’이고 90년대의 여름호 잡지들을 들추면 나올 법한 글이다. 기획이 좀 더 참신했다면 훨씬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을 데려다가 이 정도로밖에 활용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왕비호 인터뷰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장르문학 잡지에서 이런 글이 왜 실리는지 의문일 뿐이다. 「사람들은 어째서 근심걱정을 버리고 공포물을 즐기는가?」는 90년대 만화잡지나 신문 문화면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적당히 장르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맨 뒤에 원론적인 이야기 몇 문장을 붙이면 되는 글이다. 월간 『판타스틱』 시절에도 이런 글이 많았지만 그때도 읽지 않고 넘겼다. 자신의 관점이 없는 에세이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장르에 대해 궁금하면 검색하거나 책을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나마 위에서 언급한 수필과 에세이는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인 글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뿐이지, 장르에 ‘장’자도 들어보지 못한 새내기들에게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토크 「레진 VS 쿄코, 두 스타블로거의 솔직화끈 토크」는 종이와 잉크가 아까울 지경이다. 이 기획은 공포 특집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성담론과 인터넷의 성검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호러소설 검열로까지 이어진다. 뭐, 이 정도로 건너뛰는 것쯤은 이해한다손 쳐도, 검열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검열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이야기되지 않은 채 검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검열이 지니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면 적어도 검열의 메커니즘 정도는 짚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검열은 나쁜 것’, ‘꼰대 어른들이 문제’라는 식의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가 될 뿐이다. 안타깝게도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양측 다 검열에 대한 문제의식만 있을 뿐, 검열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나 사회철학적 문제의식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런 얘기는 길 가는 초등학생 붙잡고 인터뷰해도 다 나오는 이야기다.’ 원론적인, 일반 상식 수준의 토크를 싣는 것은 지면낭비임과 동시에 잡지의 철학 부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읽으면서 전(前) 영심위 위원이었던 교수라도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수준의 이야기로 끌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봄호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책 소개하는 만화」는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듯하다. 작가 자신이 했던 말처럼 ‘출발 비디오여행’ 수준이다. 신간 소개에 치중하는 것도 ‘출발 비디오여행’에서 그대로 따온 듯하다. 줄거리 요약으로 책을 소개하는 것은 학교 독후감 숙제에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심화된 내용을 다룰 수 없다면 차라리 패러디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이다. 『판타스틱』이 동종업계 신간 광고해주려고 이 만화를 싣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겠다.

 

공포특집의 허와 실: 장단점의 혼재

공포특집에 대한 부분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로버트 하워드의 「비둘기들은 지옥에서 온다」는 이 책의 가치를 높인 두 단편 중 하나이다. 작년 8월호에 실렸던 「검은 해안의 여왕」과 「지붕 위의 있던 것」보다 더 강렬하다. 미국 남부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역사,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재가 어우러져 음습한 공포를 자아낸다. 다만 해설이 아쉬운데, 집필 당시 미국 남부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나 러프크래프트 등과의 관계, 『위어드 테일즈』의 성향과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국 주류소설과 『위어드 테일즈』 등의 펄프 잡지와의 관계 등을 좀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풀어냈다면 더욱 흥미로웠을 것이다. 만약 작품해설에 제대로 지면을 할애하고 시간을 들였다면 로버트 하워드의 출생연도를 1960년으로 적는 오기 또한 제대로 수정되어 나왔을 것이다.

그렉 이건의 「야경꾼」은 『쿼런틴』(그렉 이건,행복한책읽기, 2003년 10월)을 생각하고 찾아보았을 팬들에겐 실망스러운 글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편은 1988년에 집필한 글이고 『쿼런틴』은 1992년에 나왔다. 게다가 장르도 다르다. 『내 이름은 콘라드』(로저 젤라즈니, 시공사, 2005년 4월)와 『앰버 연대기』(로저 젤라즈니, 예문 , 1999년 2월)가 4년 차이이고, 『별을 쫓는 자』(로저 젤라즈니, 북스피어, 2008년 9월)와 『저주받은 자, 딜비쉬』(로저 젤라즈니, 너머, 2005년 5월)가 같은 해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차이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버트 하워드와 같이 자신이 주로 쓰는 장르가 아니어도 재능이 폭발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렉 이건처럼 자신이 주로 쓰는 장르에서만 재능을 폭발시키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이름값을 생각하고 볼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대신 다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굳이 그렉 이건이라는 이름값에 기대어 범작을 선택한 이유를 모르겠다. 작가의 이름값에 기대기보다는 해당 장르의 전문가가 좋은 작품을 발굴하여 번역하고 이를 편집위원들이 심사하여 채택하는 과정의 엄밀함이 필요하다.

김종일의 「개들의 묘지」는 새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밋밋하게 읽을 만한 소설은 아니다. 저변에서 꿈틀거리는 하지만 너무 안정적인 선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츠다 신조의 「괴기사진작가」 또한 새롭다고 보긴 어려우나 특유의 분위기를 예리하게 살려내고 있다. 한유의 「버스정류장 소녀」도 나름의 장점을 지닌 작품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판타스틱』의 지면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다른 문학지나 웹진에서 다뤄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현재 존재하는 문학지들이 『판타스틱』에 실린 글을 평해줄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는 것은 위에서 평론의 부재를 설명하며 언급하였다. 그렇다고 아마추어 웹진에 평가를 전적으로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판타스틱』을 포함하여 장르문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평론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 실린 평론만 하더라도 문단문학의 입장에서 문단문학의 몰락을 다루며 대중문학이 문단의 몰락으로 인해 생긴 공백에 ‘침투’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전형적인 태도에 가까운데, 원래 이러한 평론이 실리게 되면 이와 반대되는 입장(문단문학을 옹호하는 입장이거나 대중문학과 장르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는 글)을 같이 실어야 한다. 200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의 특집 ‘장르문학과 한국문학’의 실린 글의 숫자와 그 내용적인 깊이를 비교해봐도 『판타스틱』이 주류문학 잡지보다 무지한 비평을 실었다는 것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며, ‘장르문학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운 증거이다. 『판타스틱』이 유일한 장르문학 잡지라고 해서 테드 창의 「숨결」이나 로버트 하워드의 「비둘기들은 지옥에서 온다」 같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할까?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라면 장르 잡지(『파우스트』 등) 뿐 아니라 여타 문학지에서도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오히려 기존 문학지에 실리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욱 교정에 신경 쓸 것이고, 자세한 평론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타스틱』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이번 호에 실린 「버스정류장 소녀」의 한유나 「고양이」의 백성민 같은 작가, 만화가들이 데뷔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유와 같은 작가가 정말 좋은 글을 쓴다면 다른 잡지에서도 얼마든지 실릴 수 있다. 또한 백성민의 경우는 만화잡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만화에 대해 제대로 이론을 공부하여 평할 수 있는 인력이 『판타스틱』에 있을지도 의문이다.

 

질문: 한국에서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은 가능한가, 혹은 필요한가?

『판타스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판타스틱』 창간호부터 정기구독을 해온 독자이지만, 이 대답에 긍정할 수가 없다. 『판타스틱』이 있으나 없으나 장르문학계에 별다른 변화는 없다. 이미 괜찮은 작품들은 단행본으로 엮여 나오거나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서 소개되는 등, 장르문학 작가의 숫자에 비해 활동공간은 오히려 넘쳐난다. 역설적으로, 조영일 씨가 문단문학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던 선택과 검증의 문제가 장르문학계에서 제기되어야 할 판이다. 이미 작가의 숫자, 팬덤의 규모보다 작품이 소개되는 지면과 공간이 더 클지도 모른다. 즉,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장르 작품은 장르 팬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현재 『판타스틱』에 실리는 작품들은 일반적인 독자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초과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장르 작가(지망생)의 숫자와 그들의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성취의 수준이, 장르문학 전문 잡지를 꾸려나갈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판타스틱』이 ‘해외 작품 수입상(輸入商)’이라면 현재 상황에서 굳이 잡지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 작품을 모아 앤솔로지나 단편집 등 단행본을 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실제로 황금가지나 웅진의 임프린트들은 바로 그 방식으로 장르 작품을 내놓고 장르 작가를 키워내고 있다. 사실 작가를 키우기 위해서는 문학지에 싣는 것보다 단행본을 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문학지가 국내 작가를 키워내고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문학지 자체가 독자들을 끌어들일 만큼의 이름값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판타스틱』은 안타깝게도 그 정도의 역량은커녕 언제 폐간될지 모르는 운명이다. 과연 이 불안정한 상황을 계속 끌고 가야 할 만한 가치가 『판타스틱』이라는 잡지에 존재할까? 인터넷에 전문이 떠 있는 단편 둘(「비둘기들은 지옥에서 온다」와 「숨결」의 전문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의 번역본과 괜찮은 에세이 한두 편을 보기 위해 『판타스틱』이 계속 나와야 할까? 기획체계와 선정체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앞으로도 수록작의 수준은 그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잡지를 월간에서 계간으로 바꾸고 문화지에서 문학지로 바뀌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기사를 쓰는 사람(의 태도)과 글을 선정하는 사람(의 태도)이 바뀌지 않는다면 결코 현재의 아슬아슬한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판타스틱』과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의 인터넷 마케팅에 대한 고언(苦言)을 해야겠다. 봄호 머리글에서는 분명 홈페이지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르문화를 다룰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고, 이번 여름호 머리글에서도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판타스틱』의 인터넷 마케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판타스틱』 홈페이지는 기본적인 과월호 소개도 없어 과월호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면 한국어 위키를 검색해야 한다. 과월호에 실린 기사들이 올라오긴 하지만 전문이 나와 있는 기사가 없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없다. 『판타스틱』이 계간지로 바뀌면서 문화 기사들이 전부 사라졌는데, 『판타스틱』 홈페이지에도 문화 기사는 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최신 정보를 홈페이지가 아닌 편집부 블로그에 가서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벤트나 신간 소개 등의 정보는 홈페이지가 아닌 편집부 블로그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사실상 홈페이지가 유명무실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 봄호나 이번 여름호에서 편집부 블로그에 대해 제대로 소개한 것도 아니다. 그저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편집부 블로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북스피어의 경우처럼 천편일률적이고 독자와의 소통도 안 되는 홈페이지를 없애고 편집부 블로그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계간지로 바뀐 이후 중단된 정기구독 신청은 여전히 지원되지 않고 있다. 잡지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지 속사정은 모르겠다.

 

맺음말: 부정적 결론

다시 한 번 질문해본다. 『판타스틱』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 존재 이유에 충실하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현재 내 대답은 부정적이고, 기획과 편집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계속 부정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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