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9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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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OBOT

Review와 Critic 사이에서
『눈 늑대』(은림 외, 거울, 2008년 11월)의 리뷰를 쓰고 나서 곧바로 『유, 로봇』의 리뷰를 쓰려고 했었지만,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이제야 원고를 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유, 로봇』 이후로 계속될 출판사들의 환상/SF 단편집 기획들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이들이 과연 『눈 늑대』 리뷰에서 지적한 한계점들을 슬기롭게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된다. 또한 현재 ‘장르문학’계에서 소외되고, 오해되며, 무시되는, ‘비평’의 몫을 맡은 한 사람으로서 거울이라는 공간에 어떠한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문학평론은 문학임에도, 지금까지 ‘장르문학’계에서는 문학평론을 문학으로 대하거나, 문학평론이 문학임을 자각하며 평론을 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리뷰’는 신작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었고, 대상을 철저히 ‘관찰’하는데 그쳤을 뿐, 어떠한 ‘담론’의 생산이나 문학적 가치의 재생산에 미치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개인적인 ‘감상’의 영역에도 충실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리뷰’를 읽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면 리뷰를 읽느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곧바로 책을 (훑어)보면 될 것이다. ‘좋은 책’, 혹은 ‘취향’의 선별을 위한 것이라면, 리뷰어들은 구구절절 토를 달 필요 없이 어떤 스타일인지만 단답형으로 적어내면 될 것이다. 자신의 취향에 근접한 블로거들의 블로그 포스트 몇 개를 토대로 알아서 판단하고 ‘좋은 책’, 내 ‘취향’의 책을 선별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효율적인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블로그 포스트는 ‘문화’를 형성해내지 못한다. 블로그 포스트는 신간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그 시점에서 잊히기 마련이고, ‘소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는 현재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철저히 ‘소비’될 뿐임을 자각하게 한다.

『눈 늑대』 리뷰 이후, 내게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거울에서 글을 기고한 바 있는 사람들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의 지적은 충분히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이다. 아니,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그들은 내게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였고, 담론의 생산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이러한 한계점은 작가와 독자의 공간이 있을 뿐 ‘글’ 자체, 혹은 ‘글’에 대한 담론을 수용할 곳이 없는 현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Quo Vadis, U, ROBOT
『유, 로봇』 또한 『눈 늑대』와 마찬가지로 현재 거울의 위치와 방향성, 미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단초가 숨어있다. 특히 『유, 로봇』에는 거울이라는, 외부에서 보면 느슨한 창작집단이 어떠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들이 꿈꾸는 SF의 미래가 과연 어디로 뻗어나갈지 궁금한 이들에게 생각거리를 준다.

소외된 이에 대한 시선, 독자 끌어들이기
표제작인 「유, 로봇」부터, 작가는 적극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동안 소외된 채 ‘독자’라는 제3자의 위치에서만 바라보던, 관찰하던 SF라는 이질적인 이야기 방식을 ‘나’, 혹은 ‘우리’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작가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다.

“들어보렴, 이건 너의 이야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네가 사실은 로봇이고, 네가 살던 세계는 거기보다 200년 후의 미래라는.”
― 『U, ROBOT』, 정희자 외, 황금가지, 2009년 2월, 9쪽

이러한 작가의 말 걸기는 해외 SF나 추리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이렇듯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경우는 국내 ‘장르문학’계에서 드문 일이다. 이는 그동안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외부’에 대한 이야기, ‘우리’와는 관계없는 세계의 이야기, ‘타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해왔던 탓이 크다. 어쩌면, 표제 「유, 로봇」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작가와 독자의 시선을 비로소 ‘우리’로, ‘나’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는 선언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장르문학’으로 부르기 전의 초기 한국 SF들이 오히려 이 부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동안 장르문학이 외국의 문물을 ‘수입’하는데 그쳤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것을 뒤늦게(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웹진 거울에 실렸던 작품들이다) 증명하는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집의 성격은 「박시은 특급」에서 자신이 본 TV 단막극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주인공,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에서 ‘엄마’ 외의 세계에 격리된 채 자라는 주인공, 쓰레기로 뒤덮인 지구에서 홀로 옛 연인의 기억을 갈무리하는 주인공,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에서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의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는 주인공, 「우주류」에서 사고로 인해 꿈을 잃고 좌절하는 주인공, 「무기여 잘 가거라」에서 ‘무기’로 인해 생긴 문제에 얽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주인공, 「다섯 번째 감각」에서 인류가 잃어버린 ‘다섯 번째 감각’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주인공, 「매뉴얼」에 등장하는 범상하지 않은 조카 등,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 전부가 이러한 소외와 소통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SF와 너무 먼 당신
문제는 『유, 로봇』이라는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이, ‘소외자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뚜렷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그리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것에 있다. SF적인 도구(gadget)와 잘 알려진 클리셰를 활용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서 따져보면 이 작품에서 주제를 표현하는데 있어 SF의 도구와 클리셰들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작품에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의문이 든다는 것은 극(劇)에서 소재가 지닌 가능성, 그리고 이 가능성을 주제의식까지 밀접하게 연결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발현해내려는 고민이 덜 되었다는 것이고, 자신에 내러티브에 익숙한 장르 클리셰를 단순히 얹어놓은 채로 안주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SF나 과학에 관심이 적은 한국인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그러면서도 참신하고 새로운 SF적 소재의 발굴과 적절한 활용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유, 로봇』은 한국 SF의 미결된 문제를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문제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파라다이스」의 경우 SF적인 배경과 중심 주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설의 주제를 심화하는데 굳이 SF적인 배경이 쓰일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SF만의 매력을 담아내지 못했다. 혹자는 작품이 좋다면 꼭 SF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SF단편집’을 표방한 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이 굳이 SF일 필요가 없는 작품이었다는 것은 분명 단점이다.

우회로와 정공법, 드라마와 SF
물론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박시은 특급」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해결책이 정공법이 아니라 편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시은 특급」에서 외계인은 끝까지 철저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지고, 그 역할도 기능적인 면에 한정되어 있다. 「파라다이스」가 이질적인 배경 하에서 일어나는 심리 드라마인데 반해, 「박시은 특급」은 친숙한 배경에서 일어나는 심리 드라마이다. 이는 작가가 SF라는 장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 드라마라는 내형에 SF라는 외형(시공간적 배경)을 접붙이기하였으나 그 연결이 근본적인 작품의 뿌리까지 닿지 못해 불완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에 비해, 곽재식이 「박시은 특급」에서 보여주는 SF관은 보다 유연하다. 곽재식은 SF의 가젯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외계인과의 조우나 연구소와 같이 우리가 SF적이라고 생각하는 소재들을 아주 밀접한 일상의 영역에서, 그것도 클리셰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언이 다시 발견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 『U, ROBOT』, 정희자 외, 황금가지, 2009년 2월, 385쪽

「매뉴얼」은 한 발 더 나가서, 예언과 휴대전화 매뉴얼을 연결시키고, 한 편으로는 이모와 고아소녀를 연결시키며 진행해간다. 하지만 그 두 부분이 아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이는 비슷한 성격의 단편으로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실린 「엄마의 설명력」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끝난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작품의 기술적, 장르적인 부분과 작품의 현실 상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연결점을 찾지 못한 채로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은 소품인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하게 판별할 수 있는데, SF 장르의 클리셰적인 배경과, 작품의 현실적인 부분과, 독자가 읽는 현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하면서도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낯설지 않은 낯섬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소외자, 소수자, SF, 사회학
「우주류」와 「다섯 번째 감각」이 지닌 소수자에 대한 시선은 이 단편집의 사회학적인 가치를 높이는 작용을 하는데, ‘장애’와 ‘초능력’이라는 고전적 SF의 주제에 천착한 「다섯 번째 감각」이 지극히 과학소설Science Fiction적으로 사회에 가닿은 것에 비해, 「우주류」는 ‘장애’의 문제를 인생과 삶의 철학으로까지 연결시키며 사회소설Social Novel(Fiction?)적으로 사회에 발을 디딘다. 그러나 양쪽 다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섯 번째 감각」의 경우 소수자 커뮤니티를 바라보는데 있어 지나치게 낭만적인 시선만을 견지한다는 데서 윤리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우주류」의 경우 지나치게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 나머지 사회 문제(본문에도 제기된 장애인권과 보호문제)가 작가의 이력에 비해 나이브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두 작품이 좋은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분량에 비해 너무 소품적으로 쓰인 감이 있고, 확장되지 못한 부분들이 아쉽다. 사실 두 단편에서 다룬 부분보다는 다루지 않은 부분들이 앞으로 한국SF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불온함의 포섭, 당돌한/기괴한/기발한 상상력에서 벗어나기
어쩌면 이와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에 선정된데 이어 『유, 로봇』이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로 선정됐다. 축하할 만한 일이고, 앞으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쥔 것이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심 찜찜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의 SF가 제도권에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SF단편을 공모하고 거울 필진들의 글도 다수 실었던 크로스로드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출판문화협회 또한 정부와 매우 밀접한 곳이다.
문화적으로 배타적이었던 장르가 이렇듯 손쉽게 제도권으로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이 작품들의 상상력이 불온하거나 체제 전복적이지 않고, 설령 비판적이더라도 수용 가능한 선에서의 보편적인 풍자에 가깝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종호 외, 황금가지, 2006년 11월)과 『아메리칸 사이코』(브렛 이스턴 엘리스, 황금가지, 2009년 8월)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매금지 처분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어쩌면 이는 장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도권의 적극적인 장르 길들이기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이는 『유, 로봇』이 상당히 대중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대중적으로 쓰이지 않았을 때 한국SF는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과 『아메리칸 사이코』처럼 정부산하단체들과 충돌하며, 불온해지고, 또한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와 더 확장된 담론들을 실질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유, 로봇』의 작가들이 진정으로 사회에 대해 독하게 발언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깊이, 더 날카롭고 아프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제도권에 포섭되어 일말의 불온함마저 상품화되거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비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향후 작가들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전략으로 글을 써나갈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의 평에서도 인용했듯이, ‘중요한 교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200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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