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8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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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클라크 단편전집 1953~1960 – 놀이와 상상력 그리고 예술

이것은 아서 클라크(의 장편)가 아니다?

아서 클라크라는 이름은 SF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까. 이른바 빅3(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에 대한 경외는, 그동안 이들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일방적인 면만 보고 생긴 환상에 기인하는 건 아닐까. 내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이 그동안의 아서 클라크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인라인의 경우는 아동청소년 SF를 꾸준히, 다량 집필하였고 그 중 몇 작품이 이미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클라크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아서 C. 클라크, 황금가지, 2004년 4월), 『라마와의 랑데부』(아서 C. 클라크, 옹기장이, 2005년 12월) 등의 대표작들이 클라크의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하지만 이번에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이 번역 출간되면서 사정이 달라질 듯하다. 클라크 또한 잡지에 걸맞은, 그야말로 잡지가 원하는 유머와 위트, 정서를 듬뿍 담으면서도 SF적인 ‘한 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독자들이 받아들인다면, SF에 대한 시선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클라크는 『유년기의 끝』(아서 C. 클라크, 시공사, 2002년 9월)이나 『라마와의 랑데부』 같이 머리 아픈 작품만 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장편에는 장편의 호흡이 있고 단편은 단편의 호흡이 있다. 특히 단편은 게재되는 시장 – 즉 잡지에 맞는 글쓰기를 요구한다. 이는 시장영합주의나 문화 소비적 입장에서뿐 아니라, 문화가 향유되고 전달되며 수많은 웃음과 눈물 속에서 꽃피는 예술이 결코 작가적 야심이 아닌 소통에 중점을 두며 걸어 나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막 장르문학 잡지가 태동한 우리에게도 잡지의 성격에 맞는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 잡지에 실려서 동시대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럼으로써 두각을 드러내어 많은 독자들 – 특히 일반 독자들의 호응과 함께 SF팬들에게도 여지없이 유쾌한 웃음과 SF적 고양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 1953~1960』은 한국 SF의 미래에도 상당히 중요한 책이다.

 

지난날의 SF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일단, 이 단편전집에 실린 작품들이 SF적으로 엄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여기 실린 단편들 중에도 우주여행과 관련한 작품들은 클라크 특유의 엄밀한 묘사들이 들어차 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재미있다. 이는 클라크의 재능이다) 하지만 여기 실린 많은 작품들은, 기존에 번역된 클라크의 장편소설을 읽고 팬이 된 독자들에게는 ‘클라크적’이지 않다고 느낄 만한 작품들이다. 혹은, SF적으로 딱딱하지 않다. 사변적 가정들이 일견 허술해 보이는 서술로 얼렁뚱땅 넘어가고,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비약들이 없다면 분량이 두 배쯤 늘어나야 할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사실 이러한 클라크의 면모를 처음 접할 한국의 클라크 팬들은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다.(나의 클라크는 이렇지 않아!) 하지만 이 단편전집이 1953~1960년까지 집필된 단편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작, 『라마와의 랑데부』는 1972년작이다. 이들을 1953년작인 『유년기의 끝』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다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뉴웨이브 이전, 이른바 ‘표지에 로켓만 그려져 있어도 열광하던’ 그 시절이다.

엄밀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적 상상력의 핵심과 개념을 충분히 설명하며 속도감 있게 전개해나가는 솜씨는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지다. 클라크가 장편을 통해 보여준 것은 거대한 시공간의 세밀화(細密畵)였다. 그러나 단편에서는 하나의 작은 과학적 발상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스트레이트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여태까지의 평가와는 달리 여타의 작가들보다도 더 능청스럽고 직설적이며 직접적이다. 또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면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하얀 사슴의 이야기』의 연작 단편들은 클라크가 얼마나 멋진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SF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절의 작품들에서 클라크는 1953년작 장편인 『유년기의 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헨리 퍼비스라는 허풍선이(?)는 작가의 페르소나 중 하나이고, 이는 과학적 엄밀함에서 깐깐한 클라크의 분신 ‘찰스 윌리스’와 대조되는 클라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유롭고 유연한 SF가 어떤 상상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헨리 퍼비스는 SF가 지닌 반대쪽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번역 SF 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한 번 걸러진 모습이었고, 번역자라는 깔대기는 물론 다양한 측면을 담으려 노력했으나 영미 SF잡지의 활력을 보여주는 데는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장르 잡지가 탄생된 지 햇수로 3년이 되어가는 이때에도 빅3의 단편집이나 해외 SF잡지의 모습이 아닌, 컨셉 단편집이나 Year’s Best 류의 ‘한 번 걸러진’ 모습을 받아들인(그것도 특정 편집자 – 도조와, 하트웰 등에 치우친) 것과 비교해보면, 이번 단편집은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SF(의 조류들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깊이에의 강요? SF를 좀 상상하게 내버려 두시오!

뉴웨이브는커녕 올드웨이브도 없는 우리나라의 척박한 SF환경에서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 1953~1960』을 이야기해야하는 이유는, SF의 초창기, SF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누렸던 시대에 과연 빅3들이 무슨 단편소설들을 썼으며 그 단편소설들이 어떻게 수많은 유명 SF잡지들을 이끌며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웨이브/포스트뉴웨이브 작가들 중 상당수는 30~50년대의 펄프 SF를 어린 시절부터 탐독했던 세대다. SF가 대세가 되기도 전에, 펄프 SF의 원초적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소수의)펄프 SF와 뉴웨이브와 사이버펑크를 동시대적으로 수입하고 받아들인 한국의 젊은 SF 독자와 작가들 상당수는, 리얼리즘과 엄숙주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한국문학의 틈바구니에서 SF를 들이밀기 위해 한국문학이 만들어 낸 테두리 밖을 벗어나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고, 또한 대내외적으로 ‘발랄한 상상력’을 강요당하는 형국이다.

5~60년대, 흔히 SF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시절의 작품들이 실린 이 단편집을 본 독자들 중에는 이런 감상을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기발하고 재미있기는 한데 문학적이지는 않은 것 같네요.” 대체 문학적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지칭하는가. 어쩌면 이런 질문은 장르문학을 쓰는 작가와 독자들마저 무의식적으로 박혀있는, ‘문학적’이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문학적’이라고 부르는, 교과서적 비평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감흥을 주는 장르의 미학적 특수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떻게든 이를 ‘문학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애써 조악하게 번역하여 기존의 담론 프레임에 끼워 맞추려는 행동은 기성세대의 학문(예술이 아니다) 영역에서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겠다는 작가들마저 이 테두리 내에 갇혀 SF의 자유로움을 스스로 부정하고 좁은 틀에 스스로 들어가려 한다면, 결국 장르가 지닌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안전한’ 글쓰기가 아닌, 무늬만 불온한 글쓰기가 아닌, 정말 ‘SF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때, 길이 열릴 것이다. SF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 방법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노라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

「나는 바빌론을 기억한다」에서 클라크는 인공위성을 통해 검열이 사라진 시대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많은 기성 비평가나 기성 문학 독자들에게 이러한 클라크의 미래학적 면모가 클라크의 가치를 입증해주는 훈장쯤 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사실 이러한 내 추측은 출판사가 띠지에 인쇄한 문구 – ‘통신위성, 인터넷 등 현대 과학에 결정적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가장 위대한 SF작가이자 미래학자’ -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SF를 읽고 SF가 주는 다양한 충격을 체험한 독자들은 띠지의 홍보문구를 보면서, “저런 식으로라도 SF를 읽는 걸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애들이나 보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싶은, SF를 지적 허영을 채워줄 도구로 인식하고, 다양한 예술적 함의를 애써 고리타분한 사회학적 은유로 단순화하여 썰 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출판사의 배려로 너그러이 이해하고 넘어간다. 사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때만이 정말로 SF를 ‘미래학’이 아닌 SF 그 자체로서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 ‘다른 방법’, ‘다른 문법’, ‘다른 독해’, ‘다른 미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사회·문화(혹은 어설픈 장르론(論)) 등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과 문법으로, 맞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구겨 넣어 절름발이 독해를 하는 광경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나 독자(와 비평가)가 SF를 SF로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쉽게 이해받기 위해 사회학적·미래학적으로 해석하기 쉬운 떡밥들을 휘날리며 써야 하는 것일까.

“자네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퍼뜨리지는 말게.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거든. 아직 우리를 지식을 좇는 고상하고 영웅적인 탐험가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 그냥 그대로 가자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 「달을 향한 모험」 중에서

내가 하고픈 말은, 작가와 독자들이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류시장에 잘 편입될 수 있는 소설을 통해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고 좋은 작품성을 지닌 SF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독자를 SF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렬한 작품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몇몇 작가들이 주류시장에 진입하는 단계에 있고 나름대로 좋은 평을 받고는 있지만, 실제로 SF를 즐겨온 사람들에게 강렬히 다가간 SF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본다. 이건 (폐쇄적인)게토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게토가 존재할 때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으며, 이 작품들이 SF라는 장르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포화상태의 해수욕장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기보다, 전용 수영장에 모여 놀다가 덩치 커진 사람들은 수영장 뿐 아니라 밖의 해수욕장에서도 놀게 한다면 훨씬 좋은 일 아닌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아서 클라크 단편전집 1953~1960』에는 「머나먼 지구의 노래」처럼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도 클라크 특유의 비전과 인류의 향방에 대한 애정 어린 근심을 보여준다.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선원과 항구 토박이 소녀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퇴락한 항구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이 식상한 플롯의 배경을 우주로 치환하면서 우주개척시대에도 여전히 우주라는 경이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복잡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클라크는 여기서 시간을 정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필멸성이 우주라는 공간을 접하면서 느끼는, 낭만이 아닌 좌절감과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표현하는데, 오히려 클리셰가 지니는 통속성의 파급력을 우주에 대한 시야에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클라크는 통속성이라는 이중함정에서 벗어나 있다.

단편소설(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근원으로 돌아가 보자. 에드거 앨런 포, 안톤 체호프, 기 드 모파상 같은 작가의, 장르적인 특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단편들에서 우리는 그들의 작품이 때로는 한없이 유쾌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인간성의 한 측면을 장르적 가젯(gadget)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첨예하게 그려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속성은 그것이 통속적으로 쓰일 때 지루해지는 것이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우리 생활 가까이 머물렀던 단편소설들은 통속적이었지만 그만큼 일상적이었고, 일상에서 쉽게 놓치는 작고 작은 이야깃거리들을 세심하게 담아내고 표현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걸작들은, 통속성을 통속적으로 쓰지 않았던 것이다.

 

놀이가 장르를 구원하리라?!

「망명자」, 「머나먼 지구의 노래」, 「거기 누구냐?」, 「요람을 벗어나, 우주로」 같은 작품들이 국내의 독자와 작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어쩌면 통속적이고 싱겁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혹자들은 「더 이상 아침은 없다」, 「궁극의 멜로디」, 「우주의 카사노바」를 읽으며 이런 아이디어가 낡고 얄팍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 특히 「홍보 활동」이나 「주동자」, 「보안 점검」과 같은 작품들을 읽으며 전혀 웃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펄프 SF 시대의 활력을 짐작케 하는 이런 작품들이야말로 인터넷 시대에 맞는 글쓰기일 수도 있다. 이것은 영합이나 순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힘 빼고 같이 놀아보자는 제안이다. ‘놀이를 망치는 자’(Spielverderber)들은 신경 쓰지 말고, 놀이에 빠져들지 못한 채 방관자적으로 관찰·분석하는 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글을 읽는 그 순간에서만큼은 놀이 그 자체에 빠져들 수 있게 하는 것만이 SF를 ‘문학적’인 틀에서 구원하는 방법이 아닐까.

중학생이 되어 초등학교 시절의 놀이를 부끄러워하는 식의, 그래서 더욱 엄격한 규칙의 축구와 농구를 하며 고등학생 형들에게 경쟁심을 가지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정말 친구들과 함께 놀이에 빠져들 수 있을까.

사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내가 멋지고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가 없어. 전초전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중요한 교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어쩌겠나.”
– 「냉전」 중에서

 

20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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