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4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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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늑대도 있다 – 청소년 문학이란?

1부 : 청소년 문학 이론편

– 청소년 문학이란 무엇인가

청소년 문학을 아무리 재개념화해도 청소년 문학은 ‘청소년 시절에 읽을 만한 문학’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김중신, 청소년 문학의 재개념화를 위한 고찰

청소년의 탄생

청소년문학의 성립을 이야기하려면 언제 청소년이라는 독자층을 독립시켜 염두에 두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서구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청소년을 독립된 독자로 가장 먼저 인식한 미국에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청소년문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진술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때 청소년문학은 틴에이지 또는 영어덜트 문학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영어권이어도 영국은 1960년대에 영어덜트문학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며, 독일이 영미권과 유사한 의미에서 Adoleszenzroman에 주목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와서이다.

청소년 문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를 잠시 되새겨보자. 최남선과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단어를 발명(혹은 발견)한 당시의 어린이 개념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방정환은 『어린이』의 주독자층을 현대적인 의미의 어린이(6-12세가량)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16-18세의 청소년 계층 독자가 가장 많았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학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0년에 불과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동’과 ‘청소년’과 ‘청년’이 학문적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 학제가 정비되면서 연령별 계층 분화가 점점 분명해진 이후이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서당, 보통학교 등의 진학률은 낮았고 진학연령 또한 유동적이었으나, 1930년대에 들면서 보통학교 진학률과 진학연령이 안정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로써 대가족의 ‘소인’일 뿐이었던 청소년은 가족의 한 구성원에 더하여 ‘학생’이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결국, 청소년이라는 계층의 성립에는 제도권이 특정 연령층에 부여한 의무적인 제도인 학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교가 연령을 근거로 학년의 위계질서를 부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이처럼 ‘나이’라는 생물학적인 기준만으로 청소년을 재단하고, ‘격리 수용’하고, 분할하지 않았다. 학교가 보편적인 사회체계로 굳어지자 청소년은 규격화와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청소년’이 탄생하자, 어른과 ‘어른 아닌 이들’은 ‘구별’되기 위해 차별화되고, ‘어른 아닌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른’과는 다른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식의 강요가 주입되기 시작한다. 주입과 계몽의 효율화를 위해 사회가 학교라는 청소년 격리수용체계를 모든 청소년에게 강요하자, 더 이상 진실한 ‘소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학생과 청소년

고등학생 연령에 해당하는 10대 후반은 아동으로의 역행을 원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듯 어른이 아이들에게 어른 되기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어른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른의 담론에 끼기를 원하지, 통제되고 제한당하는 아동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을 계몽하고 계도해야 할 청소년으로 묶어두고 싶어하는 것은 어른들이다. 이것은 누가 청소년문학을 요구하는가를 따져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청소년문학에 대한 요청이 강하게 들려오는 곳은 무엇보다도 교육계와 출판계이다.

청소년 문학을 별도의 카테고리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에는 필경 ‘청소년다움’이라는 특징을 특정 연령대에 알리고, 더 나아가 권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소년다움’을 정의하는 주체는 물론 ‘어른’으로 상징되는 기존 체제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근대에 이르러 청소년의 특징을 군인다움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는데, 이는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국가가 청소년에 대해 원하는 가치를 사회에 투영한 결과였다. 국가에서 필요한 청소년의 모범은 제국주의적 팽창에 투신할 수 있는 젊은이였기에, ‘청소년’은 진취적인 군인의 기상을 강요받았고, 씩씩한 청소년은 ‘만들어진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청소년에게 체계적으로 심어주기 위한 국가기관으로서 고등교육기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청소년’은 결국 어른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학교, 다시 말해 공교육 제도가 해당 제도의 수용 주체인 청소년과 끊임없이 불화해왔다는 점이다. 규격화된 제도 속에서 교육 ‘당하는’ 입장인 청소년은 언제나 제도권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제도권 밖을 선택하는 경우는 언제나 드물다. 공교육 제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제도를 거부한 청소년들은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수많은 보호 장치를 해제한 채 ‘학생이 아닌 청소년’을 대하는 사회의 편견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조금 더 과장하여 말하자면, 학생이 아닌 청소년은 ‘청소년’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어른들의 ‘보호 장치’는 더 이상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비록 처음부터 ‘청소년’이라는 주체의 자립을 방해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보호 장치’는 ‘학생이 아닌 청소년’을 ‘학생인 청소년’보다 불리한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청소년들은 어른들에 의한 여러 불합리한 폭력들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단지, ‘학생’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이 공교육 제도의 실상이다. 청소년기에 겪게 되는 자발적 포기상태는 청소년만을 보수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 또한 보수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수화의 폐해를 은폐하고 체제를 공고화하고자, 기존 질서라는 무기로 학생들을 더욱 압박하는 식의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청소년 소설의 문제

‘학생’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의 청소년들은 ‘소인’으로서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청소년을 ‘작은 어른’이 아닌 ‘학생’이라는 별개의 성장단계로 차별화하자,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은 ‘어린이’도 ‘어른’도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 소비사회의 하위부속품으로 전락하거나, 다시 학생의 세계(물론 일반적인 학생이 아니라 특화된 전문기술을 배우는)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청소년 소설을 쓰면서 이러한 ‘학생이 아닌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할 때 언제나 ‘사회와 관계 맺기’의 부분에서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그들이 독자적인 내러티브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억압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다움’이란 결국 학생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도록 짜인 틀을 벗어나는 순간, 소설은 판타지로 넘어가거나, 비극으로 치닫거나, 어느 시점에서 멈춰버리게 된다. 처음부터 ‘청소년 소설’로는 정면승부가 불가능에 가깝다.
‘학생’이라는 ‘청소년 정체성’을 의식하는 대부분의 청소년 문학들은 수용 주체인 청소년들의 ‘공감’을 욕망하지만, 그 욕망의 실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부여된 정체성’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러나 청소년 문학은 ‘학생’, 성장단계의 한 과정이자 과도기로써 미성숙하다는 의미가 부여된 ‘청소년’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분류한 문학이다. 청소년들이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된 성장소설에 반발하는 것은, 그러한 성장소설이 기존의 체제, 즉 어른들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편입’하는 청소년을 그리기 때문이다. ‘정상궤도’에 편입되고자 자신을 억압해야 하는, 어른에 의한 일방적 폭력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이 그 고통스런 과정을 그린 청소년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짜 청소년 소설은 장르문학인가

그렇게 청소년들이 청소년 소설에서 ‘도피’하여 다다른 ‘위안’의 문학적 시공간은 추리소설, 무협소설, 판타지 소설, 로맨스 소설, 라이트 노벨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장르문학’이라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문학들은 여지없이 하나의 ‘장르’로 지칭되어 별개의 카테고리에 묶였고, 창작의 측면에서 상업적인 고려에 의해 스스로 가능성을 퇴화시키거나 수용의 측면에서 협소한 장르적 잣대로 재단되어 왔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장르문학’의 독자적인 미학체계를 구축하고 기존의 체계 속에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게토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은 일견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주류’와 ‘게토’ 사이의 단절은 양측에 있어 첨예한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그나마 이러한 장르소설이 자생한 해외에서는 주류와 게토의 갈등이 자연스러운 부딪힘이었으나, 국내에서 주류문학과 장르소설은 해외조류 수용의 시간차로 인한 세대 간의 이해도 차이와 오해의 문제, 해당 장르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수입된 측면의 문제 등으로 기존의 문화와 어우러지지 못한 채 해외보다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문화적 맥락이 휘발된 장르소설에서, 장르 특유의 작법이나 클리셰가 주는 느낌은 단지 말초적인 의미로 수용되었고 장르의 토착화에 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유년-청소년 시절에 새로운 장르를 접하고 해당 장르의 문화를 만들어온 과거와 현재의 청소년들이 장르의 미학적 특질을 이해하고 정상적인 재생산과정을 구축하는데 실패해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장르의 역사는 끊임없는 단절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는 우리 청소년문학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기다. 1954년 조흔파의 『얄개전』이 청소년 잡지 『학원』에 연재되면서 이른바 ‘명랑소설’이라는 이름으로 6,70년대를 휩쓰는 청소년소설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생략) 하지만 이들 청소년 대상의 명랑소설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한 사회의 급격한 자본주의적 변동과 교육제도의 변화에서 ‘학생’으로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불안”을 웃음을 매개로 포착한 초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후대로 갈수록 “당대 아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 없이 모험이나 질 떨어지는 유머로 일관”하는 상업성에 매몰됨으로써 청소년문학의 한 계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다.
그리고 이때 잊힌 것은 명랑소설만이 아니라 청소년소설 자체일 수도 있다. (생략) 그리하여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든가 『끝없는 이야기』 같은 작품이 독일에서는 아동청소년문학으로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초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는 일반문학으로 출간된 것이다.이들 작품이 청소년문학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청소년 독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 다음의 일이다.

더 나은 지평을 위하여

이는 장르의 생산자와 수입자들이 장르를 게토 위주로 이해한 채 한국의 장르 게토를 만들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를 잘못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발전과정상의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장르는 근본적으로 일정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제한적인 틀로 남게 된다. 세대 간의 단절로 인해 폭넓은 연령층에 맞출 수 있는 시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특정 성별과 특정 연령, 특정한 취향 내에서만 소비될 수 있는 게토의 문학으로 고착화되자, 장르는 그러한 스스로의 한계를 ‘원래 그런 것’으로 방어하는 논리를 개발하며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장르 ‘오타쿠’들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논리로 자기복제의 열화현상을 장르의 본래적 속성으로, 그리고 그러한 속성 중에서도 ‘90%의 쓰레기’를 밟고 올라오는 명작의 존재를 들어 그 속성을 옹호하는 것은 한국의 장르 관련 논의에서 거의 ‘정답’처럼 굳어진 듯하다.

집중적인 반복 형식 덕분에 어린이 문학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나갈지, 특히 어떻게 결말이 날지에 대한 선명한 기대치를 창출해 낸다. (생략) 파격은 처음에는 충격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독서와 관찰과 토론, 마침내는 숙달의 과정을 거쳐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Margaret Higgonet, Narratives Fractures and Fragments
가장 좋은 어린이책조차도 전적으로 독특하지 않다고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친숙한 패턴의 반복이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놀랄 정도로 그 패턴의 다양한 변형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박제된 고전’의 숨 막히는 체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찾아보는 장르 소설의 99%가 ‘쓰레기’인 채 남아있다는 사실을, 단지 장르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회의적이다. 분명 장르들은 보다 나은 방식을 찾을 수 있다. 99%의 쓰레기가 아니라, 1%씩 특화된 서브장르들의 각축전으로, 무엇이 조건반사적이고 1차적인 즐거움이며 무엇이 장르의 장점을 제대로 읽어내어 더 다양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독서법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문학 뿐 아니라, 장르에도 교육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은 이해와 소통, 더 많은 즐거움을 위한 교육법이 절실하다.

좋은 어린이 문학은 독자들이 독서나 언어나 인생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지, 그런 경험을 통해 더 큰 이해력을 발전시킬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어린이용 텍스트는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하지는 않다. 대신 독자들이 더 복잡한 방식으로 반응하여 더 복잡한 이해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읽는 도중에 더 복합적인 반응을 발전시키도록 격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한국에서 ‘독서교육’은, 특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교육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고, 교육을 담당해야 할 ‘어른’들이 장르, 혹은 아동청소년문학에 대해 어린이들보다 더 낮은 수준의 이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 문제는 쉬이 풀어나가기 어려운 문제이다. 무조건 ‘교육’하거나 게토를 공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최근 들어 준수한 번역으로 해외의 명작들이 소개되고 있고 본격적인 아동청소년문학 이론서들의 번역 출간이 임박하면서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에, 이제는 걸음마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수행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소통’으로 풀어가는 것뿐이다.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리고 함께 서로를 생각할 수 있는 독서가 청소년 문학에서 이뤄져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만 특화되어 어른들을 배척하거나, 청소년들에게 한 순간의 거짓 ‘도피’와 ‘위안’을 주기 위해 환상성을 맥락 없이 소비하는 식의 판타지 소설로는 결코 어른과 함께 즐길 수도, 서로를 생각할 수도 없다. 오히려 어른들은 이러한 청소년들의 ‘게토’를 부수려 할 것이며, 청소년들은 애써 구축한 ‘게토’가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단순한 반발심에 휩싸여 더욱 굴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장르 게토’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적대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자발적 고립 상황을 타개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른들과 청소년들이 서로 게토를 사이에 둔 채 공격하지 않고 ‘소통’의 지점까지 와 있는 게토의 청소년 소설들을 전략적으로 응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무리 ‘게토’가 쓰레기로 뒤덮였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어른과 청소년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시장’에 대한 공격이나 일방적 ‘교육’으로 게토를 밀어붙이는 것은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청소년 소설의 한계 속에서, 『다른 늑대도 있다』는 어느 지점까지 와 있을까? 2부 : 청소년 문학 실전편 – 『다른 늑대도 있다』를 통해 본 청소년 문학의 현주소에서 더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2부 : 청소년 문학 실전편

– 『다른 늑대도 있다』 통해 본 청소년 문학의 현주소

여기서 다룰 『다른 늑대도 있다』라는 책은 2007년부터 창비에서 청소년문학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는 책 중 23번째 책이다. 패트릭 닐슨 헤이든이라는 미국의 SF 편집자가 청소년을 위한 SF/판타지 걸작 단편을 모아서 책이다. 원서의 기획 의도 자체가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어서, 여타 SF 전문 출판사가 아닌 창비의 청소년문학 시리즈로 나온 것은 오히려 폭넓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듯하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 SF의 독자층이 주로 2~30대이고 SF 전문 출판사들은 10대를 위한 기획이나 홍보에 그리 밝지 못하다는 현실적인 문제 또한 번역자가 창비를 선택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편집자 패트릭 닐슨 헤이든이 쓴 머리말과 번역자 정소연의 해설과 함께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머리말과 해설의 내용은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것보다는 판타지 소설에 관한 내용이 더 많다. “10대를 ‘위한’ 판타지 걸작선”이라는 명칭에 비하면, ‘청소년’이라는 화두는 적게 다뤄지는 편이다.
같은 편집자, 같은 번역자의 책으로 나온 『다른 별들로부터』, 그리고 이전에 나온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는 10대를 위한 SF 단편집이다. 이 책들도 추후에 다룰 기회가 있을 듯하다. 먼저, 『다른 늑대도 있다』의 표제작, 「다른 늑대도 있다」부터 시작하여 총 12편의 단편 중 10편의 주요 단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1부에서 청소년 문학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서는 ‘판타지’보다 ‘청소년’, ‘청소년’보다 ‘어른과 어른 아닌 이들 간의 소통’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판타지’ ‘청소년’ ‘단편집’인 『다른 늑대도 있다』에서 이 3가지 특징은 어떻게 드러날까? 판타지 소설은 본래부터 ‘전통’과 잇닿아있는, 세대를 넘어 구전, 전승되는 이야기 장르였다. 이는 내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어른과 어른 아닌 이들 간의 소통’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판타지 청소년 단편집인 이 책은 ‘소통’을, ‘전통’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아이와 어른, 소통의 시작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이야기든 써놓기만 하면 어린이들이 읽어줄 거라거나 당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상일 뿐이다. 성공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어린이들이 여러분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을 붙이는 방법이다. 혹시 진부하다거나 조금이라도 저의가 엿보이는 제목을 붙인다면 어린이들은 제목만 보고도 거부감을 갖게 될 우려가 있다. 여러분의 이야기에 ‘바닷가의 존과 루시’라든가 ‘어린 바이올릿은 어떻게 어머니를 도왔을까’. ‘피아노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즐거운 심부름’, ‘학교에서의 마거릿’ 같은 제목을 붙여 보라. 어린이들은 그런 책은 펴보지도 않을 것이며, 설령 펴본다 하더라도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또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도 매우 주의해야 한다. 거기에는 뭐니뭐니해도 독창성이나 강렬함이 요구된다. 이야기를 전개할 때에는 대화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들은 그것을 선호하니까. 게다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줄거리는 될 수 있으면 변화가 풍부한 것이 좋다. 이야기의 결말은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채워 줘야 하지만, 자유롭게 공상할 수 있을 만큼의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 현명하다. 어딘지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어린이들은 그걸 가지고 온갖 상상을 짜낼 게 분명하므로, 여러분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번에는 어린이들의 상상이 시작된다.
― 아서 그룸Arthur Groom, 어린이들을 위해 쓰려면 Writing for Children. A Manual of Juvenile Fiction

해리 터틀도브의 「다른 늑대도 있다」는 정확히 아서 그룸이 지적하는 잘못된 예시의 대표사례로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아서 그룸이 지적하는 제목 짓기의 문제부터 걸려든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선정한 것은 분명 문제라고 할 것이다. 역사에 밝은 작가인 해리 터틀도브는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늑대인간’인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늑대로 변한 주인공은 이내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쫓기는 와중에 숨어든 집의 유태인처럼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늑대’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늑대’야말로 진정으로 사회의 소외된 구성원을 폭로하는 것이다. 무척 교훈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이다. 그만큼 모범적이고, 식상하기도 하다. 늑대인간이라는 ‘소재’를, 판타지의 소재를 매우 평범하고 낮은 차원의 은유로 소비하는 작품이다. 소외된 소수자의 문제를 교과서적으로(=따분하게) 다루고, 작가의 배경지식을 (쓸데없이)활용하면서 독자의 주의와 흥미를 끌지 못하고 오히려 작품 내에서 독자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실패’의 사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단편 판타지 소설에서 무척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소외와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시각에 입체적인 깊이가 없을 경우, 작품이 이처럼 착상에 머물러 안일하게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청소년 문학의 현 문제를 반면교사로써 알려주고 있다.

외적 현실이나 내적 현실도 원래는 리얼리티이며 둘 다 중요하다. 일시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있어도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리얼리티 체험은 양자의 상호 작용에 의해 깊어진다.
우리 어른들은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어린이들의 내면에서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략) 지옥은 오늘날의 아이들도 체험하고 있다. 다만 외적으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른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뿐이다.

다른 측면에서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와 비교하면, 작가의 입체적인 문제의식이 작품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밤마다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세 남매를 둔 엄마 아빠의 시점에서 아이와 어른의 소통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밤의 세계 속에서 모험을 한다는 내용은 이미 숱한 고전에 등장한 착상이지만, 작가 셔우드 스미스는 착상의 다른 측면, 즉 아이의 감정이 아닌 어른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청소년 소설의 주체가 반드시 청소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발상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청소년들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예상 독자연령과 주인공의 연령을 일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장르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작가들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클리셰가 되었고, 독자들의 감동은 차츰 줄어들었으며, 특히 청소년 소설을 읽는 청소년 외 독자층의 소외를 불러왔다. 장르 소설에서 낮은 차원의 즉자적 반응이 당연한 것처럼 강요되자, 장르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풍부한 함의를 품으며 익어가던 착상들은 최초의 아우라를 잃은 채 장르의 필수 요소로 파편화되어 방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정치적 올바름에만 매달리지도, 착상 그 자체나 착상의 반전 그 자체에만 천착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법을 택한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는 아이와 어른의 두 세계 속에서, 아이와 어른의 ‘기다림’, 일시적인 헤어짐, 영원히 행복한 세계와의 예상된 결별과정,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단절의 상황 속에서도 부모와 자녀가 다시금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결말까지, 결코 안이한 감정이입이 아닌, 감정적 절실함과 함께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의 깊이가, ‘놀라운 상상력’이 아니어도 충분히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낸다.
작가는 작품 내에서 ‘학교’라는 체제 속에 가두는 것과 어른들이 아는 세계 속에 가두는 것, 이 2가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병치한다.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부모를 등장시켜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억지로 이해하거나 통제하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청소년들에게는 ‘다른 세계도 있다’는 것을 ‘판타지’적으로 훌륭하게 그려낸다. ‘어른과 어른 아닌 이들 간의 소통’이라는 청소년 소설의 주요 문제를 ‘판타지’라는 장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청소년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작품을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소통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는 「다른 늑대도 있다」처럼 교육이나 1차적 은유의 측면에 머물지 않는다. 엄마 아빠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어른과 아이의 소통이라는 중심을 결코 어느 한 쪽의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는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이 균형감각에 있다.

전형과 파격 사이의 ‘청소년’ 소설과 ‘판타지’ 소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

이 균형감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분명 ‘청소년 소설’을 표방했음에도 ‘전형적’이거나 ‘일탈적’인 청소년 소설, 달리 말하자면 소설의 정체성을 ‘판타지’ 소설보다 ‘청소년’ 소설에 맞춘 소설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 반면, ‘청소년’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를 적극적인 (그리고 타 작품들보다 식상한 재료의)판타지의 방식으로 풀어낸 소설들은 적어도 실패작은 면했다는 점이다.

노골적으로 틴에이지의 감성을 그대로 들여온 「캐리스」는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무척 불편하고 밋밋했으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공들인 세계관과 설정들이 충분히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실패하거나 나쁜 작품은 아니었다. 미국 틴에이지 특유의 감수성에 이입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전하고자 했던 소통부재의 먹먹함과 가족 내 갈등을 (흔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며, 10대 여성의 관계 맺기를 다룬 준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이러한 작품을 쓰기 위해 굳이 ‘엘프’와 ‘경계도시’와 정치적 알력이 등장할 개연성을 찾기 어려우며, 이 모든 것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기보다는 이렇다 할 특징 없는 로맨스 소설을 색다른 분위기로 만들어보려는 ‘무대 장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못이라고까지 여길 필요는 없지만 분명 이 과한 장식들은 이야기와 유기적인 결합하지 못하고 연결고리가 아주 느슨한, 과한 장식으로 느끼게 한다. ‘청소년 소설’에 치우친 나머지 ‘판타지’ 소설의 측면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신을 훔치다」는 ‘청소년 소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캐리스」처럼 청소년이 등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휘파람 부는 새」처럼 청소년 소설에 적당한 낭만적인 이야기를 풀어내지도 않는다. 다른 작품과 비교할 때 액션의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등장인물들도 하드보일드 소설에 걸맞게 닳고 닳은 인물들이다.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고 결말도 시원하며, 전개에도 힘이 있다. 호쾌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보면 반전이 조금 약한 듯 느껴지는 것도 그리 흠은 아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굳이 이 단편집에 실릴 만한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떨치기 힘들다. 편집자는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소설을 실은 것일까.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폭력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건조하게 묘사하는 것이나 사회에 냉소적인 인물들의 말투를 꼭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 말자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새삼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는 책에 실을 만큼의 파격성도, 이유도 없는 듯하다. 하드보일드 액션은 이미 코믹스에서 「신을 훔치다」 같은 작품보다 더 노골적으로 시각화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그래픽 노블’들은 자기방어적 폭력에 대한 사회적 확장을 더 깊은 담론의 주제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청소년들에게 하드보일드 액션을 권한다면 나는 이 책에 실린 「신을 훔치다」보다는 차라리 『배트맨』(이어 원-다크 나이트 리턴즈-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3부작) 쪽을 권할 듯하다.

웅거러: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 어린이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반(反)순응주의자들입니다. 언제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고 자신의 성취를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미움받는 동물들에 대한 어린이책을 만들었습니다. (중략) 많은 어린이책들에서 보이는 얄팍하고 행복한 세계는 아이를 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짜이트 : 선생님은 아이들이 선생님의 책들을 읽으며 ‘현실에 대해 미리 대비’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요.
웅거러 : 맞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두 작품에 비해, 제인 욜런의 「엄마 갔어」는 내용적으로도 짧고 장르적으로도 두 작품에 비해 특별할 것이 없으나 감정적인 울림은 훨씬 큰 작품이다. 제인 욜런은 같은 번역자가 번역한 『원더 월드 그린북』에서 「녹색 아이」라는 작품을 싣기도 했는데, 그 작품보다는 여기에 실린 「엄마 갔어」의 울림이 더 각별하다. 죽은 엄마의 시체가 되살아나고 매일 집 앞으로 찾아오지만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설정 자체가, 죽음에서 느끼는 공포의 감정을 ‘이별’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키며 먹먹한 느낌을 준다. 아이들에게 가족의 죽음은 세계의 변혁이자 상실로 다가가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험 많은 어른들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적 이질감은 공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엄마이지만 죽었기 때문에 놓아 보내야 하며, ‘집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는 것이다. 외부자(뱀파이어/죽음)와 거부, 가족과 집 안. 제인 욜런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호러, 판타지, 아동문학이라는 장르의 한 원형적인 이야기를 끌어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굳이 꼽는다면 ‘가족주의’나 ‘성평등’과 관련한 부분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The Gay Family in Literature for Young People」에서 “젊은이들이 동성애 가족을 알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불의에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내가 비교적 좋은 평을 한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나 「엄마 갔어」에도 해당한다. 12편의 작품들 중에서 퀴어 커플이 나오는 경우가 단 한 편도 없으며, 오히려 「해트랙 강」처럼 몇 백 년 묵은 셈법의 휴머니즘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은 꽤 실망스럽다. 또한 아무리 판타지 소설이 SF에 비해 보수적이라 해도, 미국식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두드러지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가족의 해체’까지 이야기하는 요즘이지만 대안가족의 이야기가 한 편도 실리지 않은 것은 원서의 편집자가 보수적이어서일까, 아니면 전반적으로 ‘정상’적인 ‘교육’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청소년 판타지 단편집’의 한계일까.

아름다운 전통, 만들어진 전통

『다른 늑대도 있다』에서 ‘소통’의 문제 외에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은, 영미문학의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노력과 함께 한편으로는 신세계(미국)의 새로운 역사적 전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둘 다 의미 있는 작업이고, 특히 청소년 소설에서 다루기 좋은 부분이며, 전통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시각은 우리도 본받고 배워야 할 점인데,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시도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엿보인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성공적인데 반해 후자 – ‘새로운 역사적 전통의 문학적 형상화’는 완전히 실패하거나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단지 작가의 역량의 문제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전통’의 근원적 문제인지는 확언할 수 없으나, 아직까지 새로운 전통이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닐 게이먼의 「기사도」는 영미문학의 전통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정통한 작가의 작품이다. 성배를 둘러싼 여러 기사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영미 문학의 정수이기도 한데, 닐 게이먼은 이 ‘추구의 퀘스트’를 재해석하여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으로 필요한 것’, ‘진정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을 한데 녹여내는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기사도」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역전적으로 전통적이고, 추구하는 자와 그것을 가진 자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다른 세계(관)에서 살아온 이들 간의 서투르지만 (느릿하거나 빠른) 다가섬에 닿아있다. 옛것과 새것은 기묘하게 맞닥뜨리지만 서로에 비상한 관심을 드러내며, 때로는 무심하지만 결코 완전히 외면해버리지는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서 램프를 거절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주인공의 시선, 활력을 잃은 옛것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데 있어 지켜야 할 것과, 원하는 것을 올바르게 선택하고 돌아서 후회하지 않는 삶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소품이면서도 꽉 찬 이야기다.

비단 청소년 소설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전통’의 측면, 전통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측면, 전통을 ‘다시쓰기’함으로써 전통이 지닌 미덕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분명 ‘청소년’과 ‘어른’의 세계를 이어주는 문학적 제스처로써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어른이 지키고 향유해왔던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가 만나면서 청소년들은 옛것을 고리타분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전통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은 흘러야 하며, 흐름으로써 전통은 사회의 보편적인 ‘소통’의 도구가 된다.

「조의 머리카락」 또한 이 아름다운 전통의 미덕을 되살린 훌륭한 예시라 할 것이다. 미국의 고전 걸작인 『작은 아씨들』의 후일담 형식을 띤 이 작품에서 조의 머리카락은 세계를 주유하며 ‘미’와 ‘가치’와 ‘시간’과 그 모든 것들을 거쳐 간다. 25달러에 팔린 조의 머리카락은 그 2배인 50달러로, 또 더욱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치장되었다가 다시 초라한 모습으로 조에게 돌아온다. 또 그저 진열품이었다가, 소중한 추억의 물건이었다가, 치장을 위한 소품이었다가, 이내 지나온 궤적의 향기들을 물씬 머금은 채 조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25달러처럼 되돌아온다. 큰 바다와 육지를 지나서, 대공황과 함께 변화하는 세계를 지나서, 미국과 이슬람을 지나서, 결혼과 행복한 시절과 그 밖의 여러 추억들을 지나서.
시간 앞에서 미와 가치는 무력하게 스러져가지만, 그것들은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와 그 존재 자체의 가치를 증명해낸다. 시간 속에 낡아갈수록 기억은 두터워진다. 세계를 담는 눈과 귀와 코가 세계와 접촉하며 인생의 많은 것을 담아내듯, 그렇게 조의 머리카락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세상 그 무엇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를 지닌다. 의지를 상실한 채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그 시절을 지나 종착지에 이르렀을 때, 조는 결코 생을 반추하며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이 담아온 복잡다단한 세상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그 머리카락에 담긴,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담긴 묵직한 기억들이 던져주는 깨달음 덕에, 빛바랜 것들도 일순 환한 기쁨과 미소를 머금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일 테다. 분명 「조의 머리카락」은 ‘온 세상’을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작품이 미국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미국의 역사와 문화적 저력을 얕볼 수 없게 만든다.

위의 두 작품에 비해, 20세기의 ‘미국적 전통’을 새로이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그리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거나 실패한 듯 보인다. 「휘파람 부는 새」가 그나마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작품으로 완성된 듯하나, 판타지 소설의 기본적인 골격을 별다른 가공 없이 그대로 현대에 이식했기에 소재 상으로는 ‘미국적 판타지 소설’일지 몰라도 ‘미국적’인 주제를 소재와 잘 맞물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떠한 소재에 국적을 덧입히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배경이나 소재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원형이 지닌 정신의 근원까지 깊게 생각하고 그 원형을 담아낼 틀과 함께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조의 머리카락」의 경우, 지극히 미국적인 미국의 고전 소설이 담았던 주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조는 결국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희망, 건강, 이상, 야심, 순수하게 개인적인 욕망, 이 모든 것들을 희생했다.” 19세기의 헌신적인 아내상(像)에서 벗어나려 했던 조는 결국 세상의 수레바퀴에 밀려 양로원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안다. 『작은 아씨들』로 인해 미국의 아내와 아이들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조의 머리카락」은 이러한 원작의 가치를 계승하고, 인생의 가치가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그 자체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임을 깨우쳐준다.
하지만 「휘파람 부는 새」는 70년대와 반전운동과 히피와 좌파와 포크송 등의 미국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미국적인 가치’가 왜 의미 있고 훌륭한 것이며 그게 아일랜드의 전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작품 내부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의 역사를 알고 읽는다면 미국적인 가치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지만, 「조의 머리카락」처럼 독립적으로도 인생 그 자체를 훌륭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요소들이 그저 시대상에서 빌려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소설 내적으로 그 시대상의 요소들이 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며 어떻게 엮일 수 있는지를 제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 히피와 음악과 ‘고통을 나누’는 것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설명’될 뿐이고, 작품 내에서 완전히 녹아들어 ‘표현’되지 못한다.
미국이 70년대의 교훈을 쉽게 망각한 것처럼, 작품에서도 70년대는 그저 작품 내에서 추상적으로 설명되는 가치가 사회 한쪽에 존재했던 낭만적인 시대배경으로만 남는다. ‘전통’이 전통으로만 존재할 뿐, 21세기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마음까지, 흘러들어가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시대가 흐르면서 더욱 설 자리를 잃는 자유의 가치와 ‘재개발’이, 「조의 머리카락」처럼 주인공을 쉽게 웃으면서 떠나보낼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휘파람 부는 새」를 「조의 머리카락」만큼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뼈 여인」과 「리자와 크레이지 워터 맨」은 「휘파람 부는 새」보다 더 안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편집자인 패트릭 닐슨 헤이든이 책의 머리말에서 지적한 실패작의 요건을 충족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길고 지루한 묘사를 나열하고, 거기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인상적인 부분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뼈 여인」은 앞부분에서 뼈 여인을 둘러싼 세계를 공들여 묘사하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결국 뒷부분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제의식을 설명하고 애써 독자들을 공감으로 이끌어내려 하지만, 결국 쓸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만 성공한 셈이 됐다. 「리자와 크레이지 워터 맨」은 더욱 장황한 ‘미국 아이템’ 나열과 현란한 글쓰기 기술이 이야기를 한층 더 공허하게 만드는 듯하다. 소재의 화려함은 오히려 ‘미국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소재에 담긴 의미를 퇴색시키고, 소재와 주제의 긴밀한 연결을 방해한다.

 

장르, ‘원래 그런 것’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이라는 대상과 주체를 넘어서는 그 순간 비로소 제대로 소통할 통로를 확보한다. 이를 장르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상 장르는 ‘원래 그런 것’이다. 장르의 원형을 살리되 그 원형의 표현적 상투성과 결별하는 몸짓, 그야말로 부정을 통한 긍정이 좋은 장르 소설의 핵심이다. 물론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며, 누구나 해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끝없이 장르의 핵심으로 나아가려는 작가들이라면 언젠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관문이며, 그로 인해 장르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기사도」가 전복적인 현대화로 핵심을 파고들고, 「조의 머리카락」이 세계와 인생을 아우르는 장대한 이야기를 자아내었다면,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와 「엄마 갔어」는 우직한 정공법으로 독자를 휘어잡고 「캐리스」와 「휘파람 부는 새」는 선배들의 노하우를 그대로 써내 일정 부분 성공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를 정답으로 못 박을 수는 없다. ‘소설’의 어떤 측면을 중점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답은 달라질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 어떤 장르를 쓰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3가지가 있다.

1. (아동)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 ‘보호’하기만 하면 되는 존재, ‘자아’가 덜 확립된 존재, 마땅히 ‘진보적’이어야 하는 존재 등으로 규정지어 ‘피교육자’의 위치로 고정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아동)청소년이 형성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같은)청소년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로 다루어야 한다.

아동문학이 ‘진정한 문학’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 대해 어떤 새롭고 더 나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아동문학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되는 한 아동문학은 계속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 것이다.

2. ‘청소년 문학’이기에 이러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 세계를 자유롭게 다루되, 어른의 세계(의 한 측면)만을 냉소적으로 반복·강요하여 ‘세상의 진실’을 위악적으로 묘사하거나 인위적인 충격을 주는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 또한 ‘장르’의 클리셰에 숨어있을 수 있는 보수성을 털어내도록 노력한다.

내가 버리고 싶었던 것을 버리도록 허락하거나 강요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의 모든 힘을, 이미 행해지고 입 밖에 내뱉은 것들 속으로 버리도록 강요한다.
― C. S. Lewis, On Three Ways of Writing for Children

3. ‘청소년 소설’의 독자를 ‘청소년’으로 섣불리 한정짓지 말라. 카테고리 제목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교육계와 출판계의 요구, 청소년 문학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욕망하는 모든 시도들에서 벗어나라. ‘장르’에 매몰되지 마라.
청소년 소설은 유치한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어른의 좁은 세계, 굳어버린 세계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 그 제한적인 세계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정말 읽히는 소설이 되는 것, 읽힘으로써 세계의 공고한 벽에 한 번 더 망치질로 균열을 일으키는 것, 그리하여 진정한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이 청소년 소설의 진정한 지향점이다.

어린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남들의 요구에 잘못 이용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아동”문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읽는 책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 다음부터 무엇을 독자들에게 간절하게 권할 것인지 깊이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자부심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관심사에 시중들게 하려는 이들을 비웃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존중할 가치가 있을지라도 비문학적인 관심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방의 책꽂이에는 부모의 서재에 그저 꽂혀만 있는,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많은 책들과는 달리 정말 읽히는 문학작품들이 놓여있더라는 말이 천천히 돌기 시작할 것이다. 심지어 일반문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 Christine Nostlinger, 아동문학은 문학인가?

덧붙여

12편의 수록작 중 「땅의 뼈」와 「해트랙 강」은 논의에서 제외했다. 이 두 작품은 독자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각각 어스시 시리즈, 앨빈 메이커 시리즈의 일부분으로, 각 시리즈의 세계관과 그 세계관 속의 맥락상에서만 제대로 논의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 두 작품을 이야기하여 새로운 시야를 더할 만한 부분이 적기에 배제하였다.

 

20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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