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3월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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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소녀 욜란드

1. 성장소설과 교양소설, 청소년소설, 그리고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의 한계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어떤 소설인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이야기의 장르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낀다. 욜란드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인가. 혹은 청소년소설인가. 그렇다면 성장소설과 청소년소설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성장소설, 청소년소설의 정의는 아직도 논의중이다. 게다가 이론적 정립에 방향을 정해줄 만한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독일 청소년소설은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과 그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교양소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따라 대두된 반교양소설과 시대적 필요에 따라 생겨난 청소년소설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청소년소설은 물론이고 판타지 소설과 아동소설에서도 ‘조류’라고 할 만한 이론의 흐름이 없었으며 상업적인 상황에 따라 외국 최신 조류의 결과물들을 수입해오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형성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결과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왔다. 결국 과거의 ‘명랑소설’이나 청춘소설, 그리고 청(소)년 주인공의 연애소설과 성장소설적 특징들이 뒤엉킨 채 작가의 개별적 인지에 따라 청소년소설이 쓰이고 있으며, 청소년의 현실이나 ‘성장’ 담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작가 개인의 회고적인 취향과 자극적 소재주의에 매몰된 작품들을 양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엉이 소녀 욜란드』의 위치는 무척 애매하다. 일단 이 책은 현대문학이라는 출판사의 폴라북스라는 브랜드에서 폴라 데이 앤 나이트라는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됐다. 폴라 데이 앤 나이트 시리즈의 장르적인 경향성은 뚜렷하지 않지만 판타지와 SF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소녀가 주인공인 판타지소설-청소년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픈』과 『7인의 집행관』은 주로 어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시리즈물이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가 만약 외국 소설가가 쓴 외국소설이었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디스토피아-포스트아포칼립스 배경의 청소년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부엉이 소녀 욜란드』처럼 봉건-귀족적인 중세 배경의 소설은 소위 ‘트렌드’와는 동떨어져 있다. 굳이 비슷한 느낌의 소설을 찾자면 어슐러 르귄의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이나 이사벨 아옌데의 시리즈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들은 다른 작품과 시리즈로 묶기에 애매할 뿐더러 작가의 인지도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장편소설을 출간한 적 없는 작가의, 트렌드와 동떨어진, 현재 선호 장르도 아닌 작품이 출간 기회를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청소년소설’이나 개별 ‘작가’라는 소비 트렌드에 편승한 마케팅이 없다면 판매는 물론이고 출간 자체가 힘들어진다. 트렌드와 트렌드 작가만이 살아남아 소비되는 시장의 재편구도는 작가 개개인이 파편화된 현실에서 작가집단, 혹은 동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출판사 브랜드로 흡수된 개성은 청소년소설이 전적으로 출판사에 의해 뽑힌 기획상품으로 만드는 기제다. 현재 청소년들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회고적인 취향은 작가의 개성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청소년소설 구매자의 주체가 청소년이 아닌 부모들이라는 상업적 고려에 불과하며, 사회문제에서 소재를 얻어 계몽으로 흘러가는 플롯은 (교양소설의 한계로도 언급되는)보수적인 ‘개인의 사회화’로 귀결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위에서 언급한 ‘장르’들의 한계, 즉 청소년소설적인 한계와 중세적인 한계,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디스토피아-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의 한계까지 영리하게 극복한 소설이다.

 

2. 세계와의 불화를 극복하는 방법들 – 총체성의 복원

프롤로그의 전형적인 ‘동화’ 풍의 분위기는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완전히 뒤바뀐다.(사실 프롤로그는 집필이 완료된 후에 편집 과정에서 추가된 것인데, 나는 이를 작품적인 관점에서 사족이라고 본다) 벌판은 이상적이지도 않고 우호적이지도 않지만, 공동체적인 균형을 이룬 삶의 터전이다. 이 균형은 필연적인 외부의 폭력으로 종말을 맞는다. 폭력은 결여를 낳고, 그 이후부터 주인공의 여정은 결과적으로 ‘결여’된 것으로 인한 ‘세계와의 불화’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시작이 된다.

이처럼 자연에 속했던 평온한 존재가 ‘인간’으로서 세계로 내던져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욜란드는 벌판(총체성을 간직한 자연)에서 단절된 직후부터 인간세계의 봉건적인 사회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인간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업시기를 거쳐야 하며, 여느 교양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사회화 과정을 훌륭히 수행한다. 그러나 욜란드는 자신의 위치지음이 봉건사회의 일방적이고(태생적이지도 않은) 인위적인 것임을 인지하고 있으며, 각 사회의 인간적인 구성요소와 긴장관계에 놓인다. ‘개인의 사회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부정하는 욜란드의 태도는 작중의 욜란드가 처한 불안한 사회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폭력에 의해 잃어버린 벌판(총체성)을 끝없이 향수하는 것이다. 이는 엘리아데의 ‘입문’(initiation) 단계, “어머니의 세계, 여성의 세계, 어린이의 무책임의 상태, 무지함과 성의 행복의 상태로부터의 단절”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욜란드에게는 시련과 죽음과 재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부엉이 소녀 욜란드』라는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 소설에서 시간의 유한성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림자를 난다’고 표현되는 주인공의 능력은 근현대소설의 시공간적 협소함을 정면 돌파하는 장치다. 전지적 시점의 서술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소설 상에서는 시공간의 태고의 먼 과거와 까마득한 미래가 한 문단 안에 공존하고, 한 생명의 일생이 한 문장 안에 담길 수 있게 한다. 전지적 시점이 사라진 현대소설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영속성이 이 소설에서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언급된다. (근현대)소설이 개인의 시공간에 갇히면서 역사성에 대한 비전을 상실했지만,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세계와 개인을 아우르며 잃어버린 총체성을 회복한다.(다시 말해, 단절되지 않은 시간과 세계의 시각을 회복한다)
‘개인의 사회화’를 다루는 근현대의 성장(교양)소설은 혁명적 가능성보다는 교양을 갖춘 ‘시민’이 되는 과정, 또는 그러한 과정상에서의 문제들에 천착하며 혁명 자체를 거세시켜 버렸다. 하지만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성급하게 혁명을 이야기하지도, 그렇다고 혁명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퇴행하지도 않는다.

특히 『부엉이 소녀 욜란드』가 ‘개인의 사회화’에서 그치는 교양소설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언급은 잃어버렸던 ‘혈연적 가족’과 재회한 뒤에 등장한다.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며 욜란드가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의 상대적 우월성으로 생각했던 교양의 획득이 ‘개인의 사회화’로서 근대적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회화(근대성의 성취)를 기준으로 개인의 우열을 가리는 근대적 시각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삶의 총체성을 넘어 세계의 총체성을 인지하고 복원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깨달음 뒤에 이어지는 것은, 운명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는 적극적인 혁명행위다.

 

3.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이야기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호빗』의 경우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안에서 빌보는 세계라는 수수께끼와 맞닥뜨리고 자신을 재발견하며 ‘행운동화’의 전형을 따라 고향(이상향)을 회복한다. 물론 고향은 그대로이지만 세계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고향(이상향)의 새로운 면모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로 정립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반(反)교양소설인 『향수』는 정반대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정립할 수 없는 인물이 주인공이며 자신의 완성(파괴)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헤겔이 “비더마이어적 속물성 biedermeierliche Philiströsität”을 언급하며 “개인과 현실의 조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했던 것”은, 개인이 이룩한 ‘세계와의 화해’가 소설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라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상실된 시대의 회복(횔덜린)’이 (‘시’가 아닌)‘소설’로 구현 가능한가도 문제였지만, 교양소설에서 그러한 회복이 개인의 국면에 갇혀 있다는 것은 교양소설과 반교양소설이라는 장르의 한계로 보여지기도 했다.
이처럼 교양소설의 지향점과 관련한 맥락 상에서, 『호빗』과 『향수』 두 소설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설이 절정부로 향하기 직전에, 주인공이 동굴에 들어가면서 자신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엉이 소녀 욜란드』에도 이러한 국면 전환이 동굴에서 일어난다. 빌보는 동굴의 수수께끼 놀이를 통해 자신의 양면성과 내뱉어진 이야기의 힘을 경험하고, 그르누이는 자신의 무존재성과 그로 인한 개성(이야기)의 상실을 경험한다. 욜란드는 혈연적 가족(의 이야기)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고 다시 한 번 망쳐(끝내)버렸다. 욜란드는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인연과 업(이야기)을 쌓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보름달의 완전한 원(이야기)과는 동떨어진 자신(의 이야기)의 불완전성을 절감하면서, 동굴에 돌아가지 않은 채 자신을 내던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상황에서 돌연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고, 잊고 있었던 인연의 실을 다시 발견하며, 혁명으로 향하게 된다.

 

4. 혁명의 2가지 길 – 현재적 혁명과 잠재적 혁명의 통합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에서 세계는 이미 파괴돼 있다. 주인공은 이 파괴된 세계의 비극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를 ‘좋았던 옛날’로 복원하려는 몸부림조차도 대부분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세계는 단번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희망의 실마리마저 기만적인 성공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부엉이 소녀 욜란드』에서 세계의 파국은 유예된 비극, 다가올 미래의 숙명이지만 현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저편의 먹구름으로 존재한다. 유한한 인간은 다만 자신의 세대에서 온힘을 다해 살아가고 다음 세대에 자신의 기억을 남기는 역할을 할 뿐이다. 클라우스의 선택은 역사의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지만 개인의 역사는 비극으로 자리한다. ‘역사적 개인’으로서 주어진 숙명을 벗어나 스스로 죽음과 비극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또 그 타인의 선택으로 숙명을 잃어버린 개인은 어떻게 새로운 삶의 궤적을 그려야 할 것인가.
‘낭만적 사랑’이 거세된 숙명을 거부함으로써 클라우스는 고독하고 비참해진다. 제일라는 욕망이 낳은 미래를 결국 자신의 실수로 놓치고 만다. 그 사이에서 욜란드의 세계와 운명의 궤적은 두 번 무너진다. 욜란드는 극단적인 두 사랑의 비극적인 결말을 목격한다. 뒤틀린 숙명과 욕망은 두 사람을 갉아먹으며 그들의 인생을 파괴한다.
그러나 클라우스의 선택은 미래의 진정한 왕으로서 잠재적 혁명으로 자리하며, 욜란드의 선택은 현재의 진정한 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제일라의 개입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현대소설이 과거(의 가능성)를 거세함으로써,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이 미래(의 가능성)를 거세함으로써 역사적 총체성을 잃어버렸다면,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중세적 세계관으로 돌아감으로써 역사적 총체성을 회복한다. 또한 그와 동시에 정해진 운명과 사랑을 거부하고 혈연적 가족이 아닌 새로운 가족을 스스로 형성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며 중세적 한계를 벗어난 총체성을 제시한다.

 

종합: 소설이 아닌 ‘이야기’로 장르적 한계를 넘어서기

『부엉이 소녀 욜란드』가 여타의 청소년소설, 성장(교양)소설, 판타지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 청소년소설로써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작가 개인의 회고적 취향에 기대지 않는다. 작가가 현실에서 체험한 문화적 취향들이 아니라, 작가가 읽어 온 텍스트들을 충분히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에 안착시켰다. 둘째, 성장(교양)소설로써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개인’의 문제에 매몰되거나 섣불리 사회의 변혁을 말하지 않고, 사회의 변화와 흐름을 끌어가는 운명들의 교차를 총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셋째, 판타지소설로써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중세적 세계관의 한계를 역사적으로 인지하고, 가장 작은 인물과 가장 큰 인물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들을 동등하게 다루며 현재적 혁명과 잠재적 혁명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중세적인 세계관의 판타지소설은 물론,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의 한계 또한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 소설은 겉으로만 보면 장르적 전형성으로 점철된 ‘청소년-판타지-성장소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3가지 ‘유행’ 장르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지향점을 품고 있다. 장르소설로써 『부엉이 소녀 욜란드』의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들은, 이 이야기를 소설적 ‘전형성’의 틀로 인지했기에 벌어지는 오류다. 욜란드의 이야기는 정형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정형적이지 않다. 운명은 빗겨가고(판타지소설), 사회화의 전형에서 빗겨나며(성장소설), 심지어 지금은 공개되지 않은 속편은 청소년이라는 연령대를 단순히 이어가지 않는다.(청소년소설) 소설-장르의 한계를 버림으로써 이야기는 제자리를 찾고 비로소 결말을 맺는다.

 

201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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