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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맥심 화보의 윤리

영화에서 여성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과, 문제의 맥심 화보에서 가해자를 다루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에서는 피해의 공포와 가해자의 행동이 불러오는 불쾌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맥심 화보에는 그걸 의도적으로 ‘편집’해서 ‘삭제’했다. 가해자의 ‘카리스마’에만 포커싱하면서 피해자를 익명화, 대상화하고 살해한 다음에 물건처럼 다루며, 거기에다가 농담이랍시고 엉덩이에 손을 뻗치는 사진을 넣고서 “이번 컨셉은 강간범이 아닙니다” 따위의 캡션을 넣는 저열한 인권감수성까지 보여준다.
김기덕이 까이는 이유와 이창동이 좋은 작가로 인정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남성의 시선만을 너무 좇아가면 어쩔 수 없이 여성은 가려질 수밖에 없다.(피에타) 피해자 여성(밀양)이나 가해자편 여성(시)의 윤리적 선택에 대한 여지를 주지 않고 가해자의 행동을 ‘수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능동적이든 아니든 결국은 ‘대상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의 피사체를 담을 때에도 늘 윤리적 선택이 들어간다. 하지만 영화에는 내러티브를 통해서 맥락을 넣을 구석이 많지만, 사진은 오로지 그 자체로 말해야 한다. 그 사진이 윤리적이지 않다면, 거기에 대한 ‘이유’가 – 최소한 대중은 아니더라도 일각에서라도 납득은 되어야 하는데, 맥심 화보는 거기서 실패했다.
‘미화’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상황을 ‘지배’할 힘이 있는 남성을 전면에 놓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여성을 배경에 놓는다면, 그것은 힘에 대한 찬양이자 미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냥 한두 줄의 개드립으로 사진이 담은 권력욕(성폭력은 권력욕의 발현이지 성적 충동의 발현이 아니라는 것은 연구로서 증명된 사실이다)을 ‘풍자’라고 비껴가면서 읽히게 할 수는 없는 거다. 그것 자체도 또 하나의 폭력이다.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힘’이 약자에게 쓰인다는 것, 그것을 포커스에 맞추면서 상황을 희화화하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도 정당한 비판을 가로막는 요소다.(“웃자고 한 거에 왜 죽자고 덤벼들어요? ‘풍자’라니깐.”) 그래서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나쁜 남자는 범죄자가 아니라 ‘마음’을 갖고 노는 남자를 말하는 것인데, 맥심은 그런 여성들을 ‘조롱’하면서 나쁜 남자=범죄자라는 등식을 가져온다. 이건 ‘풍자’가 아니라 명백히 ‘조롱’이다. 그것도 늘 피해당하고 있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물’으로 삼으면서 조롱한 것이다.
나쁜 남자의 ‘권력’은 인간관계를 자기 마음대로 이끌 수 있는 데서 오지, ‘폭력적 수단’으로 상황을 장악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단어의 사회적 맥락을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끼워맞추니 자꾸 ‘녹색성장’이니 하는 개드립이 먹히는 거다.
언어를 자신의 의도로써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렇게 권력관계의 상층부로 자신을 자연스럽게 가져다놓는 것, 그렇게 권력을 쥔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가해자의 힘에 포커싱하고 피해자의 약함을 다루며 ‘풍자’라고 주장하는 것, 모든 사고과정이 다 잘못됐다.

 

201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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