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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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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자평에 대해

20자평은 호평을 쓰기엔 괜찮은 방식이지만, 혹평을 쓰기엔 한계가 너무 많다. 왜 구린지를 이야기하면서 상투적이고 구린 언어로만 말하고 있다면, 평자의 안목이 구린 것인지 아니면 신경 써서 혹평을 쓰기도 귀찮을 만큼 ‘아웃오브안중’의 졸작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평보다 더 어려운 것이 혹평인데, 문제는 게으른 평자일수록 혹평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난한 과정인데, 혹평은 그 지난함을 뚫고 건져올려야 할 언어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작품을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업적인 평자의 윤리가 작용하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아마추어 평자들은 게으른 혹평을 자신의 권리로 휘두르는 데 익숙하지, 혹평에 마땅히 따라야 할 ‘책임’을 간과하게 마련이다.

성실함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직시하여 싫음의 핵심을 꿰뚫어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싫음은 싫음으로 치워두고 싶을 아마추어 평자들에게 이는 책임이 뒤따를 문제도 아니며 의무가 뒤따를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매체에 실리는 20자평은 달라야 한다. 매체의 역할이 20자평에서 끝난다면, 리뷰어와 비평가는 사라지고 깊이 없는 아포리즘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다)

짧게 핵심을 드러내는 20자평은 공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텍스트의 풍부한 결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물론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20자평은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한계를 보완하는 작업도 불가결하다. 20자평에 대한 보완이 없어져 가면서 20자평을 하는 사람들도 평이 짧은 것을 당연하다 여기고, 풍부한 결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시대라고 짧은 글만 쓰고 있지는 않은가. 중요한 것은 글의 길이나 글 쓰는 속도가 아니라, 공유할 필요가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알기 쉽게 풀어 쓰는 일이다.
기성품 같은 대상물을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하는가는 여전히 예술가들의 몫이다. 네이버 평점, 몇몇 평론가의 별점평가 평균값, 인터넷 뉴스 기사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비평이 예술이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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