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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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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노아]를 ‘해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노아는 실패했는가, 아니면 그조차도 창조자의 뜻인가.’ 그렇다면 창조자는 실패할 것을 알고도 방주 밖의 뭍짐승들을 멸절한 것인가. 여기서 노아 시대의 재앙이 (일찍이 에녹이 예견하였던)‘불의 심판’이 아니라 물의 심판이었다는 점(영화 속에서 므두셀라는 왜 불이 아니라 물인지 의아해한다), 무지개가 ‘약속’이 아닌 ‘축복’으로 재해석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영화에서 창조자는 처음부터 물로써 인류를 멸절할 의도가 없었으며, (노아의 말처럼)이 땅을 ‘새로운 에덴’으로 만들 생각도, 노아의 식구를 새로운 에덴으로 이끌 생각도 없었다. 다만 세상을 이대로 두면 셋의 후손이 살아남기 힘들 만큼 카인의 후손이 환경을 파괴할 것이기에, 셋의 후손만 살려두고 카인의 후손(과 그들의 손을 탄 생물들)을 멸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그나마 녹색을 간직한 므두셀라의 산을 제외하고는)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찍은 황량한 폐허들과, 거친 땅에서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노동해야 하는 노아의 식구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나무는 모두 뽑히고 잘렸으며 풀뿌리 하나 찾기 힘든 척박한 땅이 끊임없이 지평선을 채우고, 도시의 폐허에는 금속폐기물이 널브러져 있다. 인간성이 파괴된 카인의 후손들은 창조자의 의도를 거스르며 육식을 탐하고 인신매매를 해서라도 붉은 고기를 얻으려 한다. 시체가 묻히지도 않은 채 구덩이에 쌓여가고, 인권은 집요하게 유린당한다. 카인의 후손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한다.’

영화에서는 생략했지만 그래픽노블 [노아]에서는 노아가 ‘선지자’로서 아카드 왕(영화에서는 두발가인)의 도시에서 물의 심판을 경고하지만, 곧바로 추방당하면서 다시는 도시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아카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창세기의 구절처럼 모든 것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말은 방주 안의 생명을 보살피고 홍수 이후에 땅을 일구는 것을 의미할 뿐, ‘정복’을 뜻하지 않는다. 두발가인과 노아는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우월하다고 믿지만, 두발가인은 창조자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마음대로 이용하고 버리고 죽이면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노아와 다르다. 끊임없이 원죄와 카인의 살인(뒤에 이어진 수많은 살생)을 되새기며 창조자의 뜻을 헤아리는 노아와 달리, 두발가인은 인간이 창조자에게 버림받았지만 어떻게든 땅(의 모든 것)을 정복하고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두발가인은 노아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셋의 후손이 ‘아버지’와 (죄 없음을 상징하는)’허물’로부터 단절하도록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된다. 노아는 비록 아버지와 허물을 잃었지만 창조자라는 아버지 밑에서 가부장으로 살아간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세 아들처럼, 그도 아버지인 창조자의 뜻을 헤아리려 눈치를 본다.

그가 처음으로 창조자의 뜻(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해석)을 거스르는 장면은 순수(innocent)를 잃지 않은 기적적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인데, 그는 기적이야말로 계시임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자비심을 느끼며 칼을 내려놓는다. 영화에서 나오는 기적의 기원은 므두셀라에게 있는데, 첫 번째 기적은 오래 전부터 간직해온 것이 발아한 것이고, 두 번째 기적은 오래 전에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발아한 것이다. 그러나 두 기적은 다르면서도 같다. 두 기적 모두 ‘방주’(의 참뜻)라는 자궁을 만들어낸다.

[노아]의 줄거리가 성경의 문구와 다르다고 반발하는 모습은, [성경]의 문구를 고정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근본주의 개신교 계열에서 특히 자주 보인다. 하지만 이 즉물적인 반응은 오히려 ‘전통’에서 단절되어 ‘만들어진 전통’으로 기능하는 [성경]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근본주의 개신교(와 이슬람교)와 [노아]의 ‘해석’을 놓고 보자면, [노아]가 더 ‘전통’적인 아브라함 종교의 뜻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타나크(흔히 개신교에서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공통 경전)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들은 오늘날 해석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태생적으로 고정된 텍스트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해석자들의 구전텍스트와 토론의 역사가 쌓여 성경이라는 가르침(토라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법이라는 뜻이다)의 총합을 이뤄왔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미드라시מדרש를 탐독하며 시나리오를 구상했다는 각본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주제별로 성경을 해석하는 미슈나와 달리, 미드라시는 구절별로 해석하는 방법을 모은 것이다. 노아가 홍수 이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는 것이나 ‘아들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창세기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토대로, 노아의 심리상태를 역추적하며 시나리오를 만들어갔을 아리 핸델과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미드라시를 ‘포스트모던 문학’에 비유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분명 [노아]는 아브라함 종교의 전통 아래서 다시쓰기한 후근대 서사다.

오히려 개신교인들이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노아]의 해석과 메시지에서 (개신교인이라면 질색하는)영지주의/신비주의 텍스트의 영향력이 짙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진화론적인 창조를 보여주는 듯하더니 정작 인간은 빛에 둘러싸인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며, 인간이 뱀과 선악과라는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게다가 천사들은 인간을 따라서 지구로 떨어지며 ‘빛의 존재가 세계에 갇힌다.’ 빛의 존재였던 인간이 육신에 속박되어 빛을 잃고 에덴으로 갈 수 없는 것처럼, 천사들도 돌과 흙이라는 육신에 갇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오직 육신의 희생을 거쳐야만 빛의 영靈으로 회귀하고 천상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인류는 결코 홍수 이후에도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홍수 이후에 다다른 땅에서도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불완전한 세계 속에 갇힌 인간이 불완전한 자유의지로 창조자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영지주의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영지주의는 인간이 ‘순수’한 빛으로 회귀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데미우르고스(창조자)의 세계가 진정한 빛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에 비참한 육신을 이끌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를 간직한 죄 없는 존재로써 ‘영혼’이 아닌 ‘짐승’과 ‘갓난아이’와 ‘희생’을 지목하는 데서 [노아]는 영지주의와도, 기독교와도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노아가 결정적인 순간에 창조자의 뜻(이라고 믿었던 인류의 멸절)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는, ‘선악’이 아닌 ‘자비’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나엘은 노아에 반대로 방주에 오르지 못하고, 영화에서 나엘은 성난 군중에 짓밟혀 죽는다. 노아가 나엘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나엘을 보기에 앞서 인류의 죄악이 어디까지 미쳐있는지, 자신과 자신의 식구조차도 그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써 노아는 절망적인 인류의 한계를 절절히 깨달았다. 노아가 자비를 버린 것은 어설픈 자비가 다시금 세상에 죄악을 창궐케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아가 두려워한 것은 창조자에 버림받는 것도, 자신이 인간성(자비)을 잃는 것도, 살아남은 모든 이들에게 미움 받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는 심판 이후에도 죄악의 사슬이 끊이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다. 살려달라는 방주 바깥의 아우성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 인류를 죽이는 창조자의 뜻을 받들 수 있었던 것은 방주 밖의 모든 인간이 죄악 속에서 태어났으며 이미 죄악에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짐승의 고기와 피 맛을 본 인간은 힘(권력)을 차지하려 살생한다.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이 두발가인의 논리에서 본 것은 아버지(창조자, 또는 창조자와 연결된 권위로서의 아버지) 없는 세상의 권력이었다. 두발가인과 함은 아버지를 따를 수 없는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왕이 되고자 떠돌아다니고,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두발가인이 실패한 까닭은 그가 창조자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욕망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함에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함은 고기와 피의 맛(창조자의 뜻을 거스름으로써만 취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의 맛)을 알았지만, 두발가인의 옆이든 노아의 옆이든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난다. 그는 카인처럼 죄악을 범한 살인자이고 셈(의 가족)이나 야펫처럼 노아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지만, 죄로 벌어진 그 모든 파괴를 목격하고 경험해 본 유일한 인간이다. 그는 노아의 식구와 병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길을 향해 떠난다.

노아는 포도주에 취한 채 자신을 버려두지만, 일라는 노아가 겪은 모든 고통과 죄조차도 창조자의 뜻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죄와 고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죄와 고통을 끌어안고서 살아남은 인류의 곁에 머물 것인가. 그 모든 굴레를 인간의 선택(자유의지)에 맡긴다는 점에서 [노아]는 창조자의 뜻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영화임이 명백해진다.

창조자가 ‘말’이 아니라 꿈과 계시와 기적으로 노아에게 뜻을 전하는 이유는, 창조자의 뜻이 인류의 자유의지를 거쳐야만 비로소 창조자의 창조의미에 맞게 발현되는 것이며, 인류 스스로 죄와 축복을 안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창조자의 뜻이 우주에 직접적으로 실행된다면, 수많은 창조물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들의 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창조물이 스스로 의지를 토대로 모든 생명과 공존하는 것처럼,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제 때에 싹을 틔우는 것처럼, 창조자는 생명이라는 씨앗을 심고 싹은 그 의지대로 꽃과 열매를 피워내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자가 창조한 까닭일 것이다.

새로운 땅, 새로운 흙에 씨앗을 심고, 남은 인류를 축복하며, 죄 없는 생명을 보살피는 것처럼, 영화의 의도는 우리가 새로운 땅에 딛고 설 자격이 있는지, 씨앗을 심고 있는지, 남은 인류가 서로 축복하고 화합하는지, 죄 없는 생명을 보살피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일 테다. 영화는 정의 대신 자비를 선택했고, 자비는 생명 자체를 긍정하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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