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2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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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소설과 장르 픽션

1. 근대소설과 장르 픽션

장르소설은 소설의 하위개념인가
많은 이들은 장르소설과 근대소설을 통칭해서 소설이라고 하고 장르소설은 소설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장르 픽션과 근대소설은 무척 다를뿐더러 하위개념도 아니다. 여기서 나는 ‘근대소설’이라고 붙여 썼지만, 실제로는 ‘근대’와 ‘소설’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들어있다. ‘근대’는 중세라는 세계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세계 인식, 즉 인간을 ‘인간적인 것’과 분리시킨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근대소설은 이러한 근대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여러 장치들을 소설에 도입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소설은 ‘근대’의 발명품이며, 전근대 소설은 근대소설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현대를 ‘새로운 중세’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보면, 장르 픽션은 포스트모던 픽션이 아니라 ‘새로운 중세’ 픽션이며 장르소설은 근대소설과 정체성이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

발명된 개인
근대소설이 만들어졌던 시절에는 (발명된)‘개인’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나 주관적인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할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산문의 자유로움을 활용하여 ‘개인’의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 등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근대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인식이다. 사회 속의 ‘직업’, 공동체 속의 특정한 역할 을 맡은 구성원으로서 존재했던 인간이 근대에 이르러 사회구조의 대전환이 시작되자 특정 직업이나 역할, 신분과 같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이름 없는, 익명성에 파묻힌 존재, ‘개인’으로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은 물론 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불안하고 우울한 자유의 사회 속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근대소설의 바깥 – 재현과 복원
인간의 예술은 공동체의 과거, 사회의 과거를 잃었고, 과거의 이야기들은 계몽이라는 목표로 교정당한 ‘아동문학’의 몫으로 축소되었다.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남은 ‘옛이야기’인 아동문학은 본질적으로 산문의 묵독이 아닌 운문성과 낭독, 이미지를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근대소설 이전의 모습을 간직해오고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의 본래적 모습, 세계의 비밀과 속살을 인간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닌 총체적 세계의 관점에서 노래하고 재현하여 복원한다는 의미가 간직되어왔다.
이미지와 이야기의 공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이야기의 낭독을 통한 재현이 가장 본질적으로 다뤄지는 것도 아동문학이다. 현대에도 아동문학이 가장 큰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해주기 때문이다. 화자가 세계를 알지 못하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신조차 잊는 근대소설의 파편성은 아동문학의 자기완결적 단순성을 유치하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매도했지만, 이야기의 복원은 절대적으로 근대소설의 대립항인 아동문학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아동문학과 근대소설이 현대에 이르러 절충하게 된 것이 바로 장르 픽션이다.

장르 픽션의 재현과 복원
장르 픽션의 문체와 구성, 주제는 장르가 만든 클리셰 내에서 소환된 것이다. 여기엔 강력한 통속성이 있다. 하지만 통속성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장르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끊임없이 나온다. 장르 픽션에 등장하는 인물은 분명 근대 소설의 개인을 닮았다. 하지만 전근대의 이야기들처럼 유형화되어있다. 도식적이지 않고 복잡하게 보이는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장르 컨벤션 내에 속하게 된다.
이처럼 장르 픽션은 수많은 소설이 사용하면서 확장되고 구체화된 특성과 성향을 받아들인 소설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장르가 뿌리내리고 있는 사상, 역사적 배경, 해당 장르의 걸작이 만들어낸 수많은 장치들, 장르가 품고 있는 궁극적 목적, 세계인식과 세계를 이해하고 묘사하는 방식 등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근대소설에 장르의 도구를 빌려왔다고 해서 그 소설이 자동적으로 장르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정한 사상과 역사를 가진 도구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도구의 사상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재해석이 수반되어야 한다.
특정 장르의 도구를 사용한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 다시 말해 장르 독자들이 장르 소설로 분류된 소설을 읽는 것은 독자가 자신이 장르 소설들을 읽고 이해한 장르의 특성을, 지금 읽고 있는 장르소설이 어떻게 활용하고 ‘재현’해내는가를 지켜보기 위해서다. 만약 장르소설이면서 그러한 고민이 없다면, 그 소설은 장르소설로 읽히지 않고 그저 (근대)소설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장르 범위 밖의 재료로 장르를 새롭게 구축하는 새로운 조류가 장르를 언제나 재정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장르는 결국 그 근본적인 도구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로맨스라면 연애의 문제, 추리라면 추리와 사건을 이해해가는 논리방식의 문제, 판타지라면 실제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등장시키고 거기에 어떤 역사와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 SF라면 과학적이고 사변적인 장치로 세계를 어떻게 확장하고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2. 장르 픽션, 무엇을 할 것인가

시장과 출판사의 문제
그렇다면 장르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규명할 수 있으며, 어떤 소설을 장르소설과 근대소설로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전에 먼저 상기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 소설이 실제로 장르소설인지 근대소설인지와는 별개로, 서점에서 어떤 카테고리에 속할지는 순전히 출판사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시장 안에서 장르는 독자가 아닌 소비자들을 위한 분류법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작가가 실제로 그 장르(의 역사적/사상적 방식)를 토대로 집필하지 않더라도 출판사의 판단에 따라 특정 장르의 카테고리에 끼어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잘못 끼어든 이 소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정말 모든 관점에서 탁월한 소설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처음에는 오해할 수 있겠지만, 곧 독자들이 제자리를 찾아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특정 장르의 독자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잘못 끼어든 그 장르의 독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소설로 읽힐 가능성도 있다. 이렇듯 출판사에서 장르를 잘못 규정하게 되면 어떤 부류의 작품들은 독자들과 만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오해와 편견에 파묻혀 사라질 수 있다. 장르 독자들이 장르 작품을 외면한다면, 그 책임은 시장과 작품을 분석해서 책에 걸맞은 독자를 찾아주지 못한 출판사에 있다.
그렇다면 한국 장르 픽션의 문제는 모두 출판사의 문제로 귀결되는 걸까?

독자와 소비자 사이
우리나라에서 장르소설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출판사와 작가가 장르의 사상과 역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장르가 고민하고 쌓아온 즐거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장르 판타지 소설 붐이 꺾인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특정 연령대와 특정 세계관만으로 장르를 재단하고 외연과 가능성을 스스로 좁혀버린 작가와 출판사였다. 아동용 판타지와 성인 판타지 소설을 시장적으로 완전히 분리/단절시켰던 것이다. 소비자만을 따르던 출판사들은 독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와서 새로운 소비자를 만들기 위해 ‘영어덜트 소설’, ‘청소년 소설’을 앞다투어 번역하고 작가를 발굴하려 하지만, 여태껏 ‘독자’가 아닌 ‘소비자’만을 따랐다는 사실만 부각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독자를 특정 연령대와 세계관에 갇힌 소비자로 만들면서 스스로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연령대와 성별, 취향에 따라 나뉘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한국의 출판시장은 장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없다. 장르의 역사를 쌓아나가고 외연을 확장해가면서 ‘독자’를 늘리는 데 실패했기에 독자들은 연령과 성별과 성향으로 나뉘어 모래처럼 흩어져버렸다. 시장이 무너지자 작가집단 형성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만들어갈 사상적 토대도 붕괴됐다. 장르 픽션이 철저히 ‘이식문학’이 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낭독과 이미지의 파편에 갇힌 한국의 장르 픽션
혹자는 (특정 시기에 한정된)판타지와 무협이 대량으로 작가를 배출해낸 사실을 꼽거나 로맨스 소설의 성공을 반례로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은 장르 픽션의 성공이라기보다는 낭독과 이미지의 파편적 성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만화, 영화, 게임 등의 시장과 함께 단시간에 거대한 독자층을 형성했던 판타지와 무협의 상업적 성공은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자극 방법을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다. 그 자극 방법은 바로 기형적이고 즉물적이며 왜곡된 형태의 낭독과 이미지였다. 영상매체를 모방한 과장된 표현방식이나 내러티브가 붕괴된 클리프행어식 장편연재 구성, 유행어의 남발 등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그러한 특징은 특정 기간과 특정 연령대의 공감대에서만 작용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극 방법으로 만들어진 하위 장르들은 시장성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로맨스의 성공과 시장 형성의 문제
그렇다면 로맨스처럼 국내에서 자생에 성공한 장르의 비결은 무엇일까? 국내외의 소설들이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소개되었고, 로맨스 소설을 처음 읽었던 10대가 20~30대가 되어서도 로맨스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각 연령대에 맞는 로맨스 소설들이 창작/번역되었다. 그로 인해 세대 간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고 각 연령과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시장규모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특정한 독자층을 상정한 작품도 상황에 따라 전체 연령대에 소급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장르의 독자와 로맨스 독자를 동시에 끌어들일 수 있는 작품들이 꾸준히 창작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되었다.
이처럼 장르 픽션이 지속적으로 창작이 가능한 시장규모를 유지하려면 장르가 끊임없이 새로운 독자(특히 10대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기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장르 고전의 재해석도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장르와의 연계로 외연을 넓히고 발전해가야 한다. 새롭기를 그친 장르는 파편화되고 고립된 독자군에 갇히고 만다. 유연한 (신인)독자와 유연한 (신인)작가를 계속 발굴해내야 시장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의 장르 픽션은 파편화된 서브장르들이 개별적으로, 탈맥락된 채 수입되었고, 몇몇 장르의 수입 유행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장르 독자가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에서 지속적인 문화 형성이 불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포괄적인 체계가 아닌, 불연속적인 유행으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유행이 아니라 문화가 형성되려면, 더불어 트렌드가 아니라 시장이 형성되려면 출판계부터 장르 픽션에 대한 ‘이식문학’적 태도에서 벗어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틈새전략과 장르 픽션
그렇다면 문화와 시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펭귄의 방법론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가 만들어낸 ‘대중’은 분열되었다. 한국의 출판시장은 붕괴되고 있다. 하지만 장르 픽션은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 라이트노벨은 벌써 탄탄한 시장규모를 토대로 작가를 배출해내고 있으며 로맨스 소설도 일찌감치 TV드라마로 진출했다. 이제는 좀비 영화나 드라마까지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소설’이 아닌 ‘픽션’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장르 픽션은 문화로써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시장은 거대한 덩어리에서 수많은 틈새로 재편성되고 있고, 하나의 틈새는 여러 틈새와 느슨한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 장르 픽션 애호가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연결고리를 찾아내 틈새를 서로 잇고 독자적인 문화로 숨쉴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문화로 연대한다면 시장은 역사를 일구는 밭이 될 수 있다.
문학 아래로 모여 있던 문화는 이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분열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의 장르 픽션이 나아가야 할 길은 한국 장르 픽션만의 ‘연대’와 ‘역사’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문화 전반에서 손잡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고, 한국 장르 창작가들이 새로운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다.

연대와 역사의 방법론
어떻게 하면 연대할 수 있을까. 먼저 음악과 영상 분야, 그 외의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장르 창작가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외국 장르 작가들은 직접 음반 발매에 참여하거나 유명 음악가들과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문화 전반의 흐름을 만들었다. 또한 게임, 만화, 라디오/TV드라마, 영화 등의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장르 픽션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외국의 창작가들은 ‘장르 문학’이라는 서점의 한 카테고리에 자신의 비전을 스스로 가두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교류할 수 있는 예술가도 많다. 근대의 시장이 만들어낸 카테고리에 묶일 이유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역사를 다시 쓰라는 말은 잘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좀 더 풀어 쓰자면,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은 이제부터 새로운 작품으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다는 말과 차이가 있다. 외국에서 정리한 장르 창작가들의 정전목록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눈으로 장르 픽션의 정의와 철학을 다시 쓰라는 것이다. 장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장르문학’이나 ‘경계문학’ 같은 단어를 지어내는 것만으로 변하지 않는다. 장르 픽션이 외국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번역해오는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한국의 장르 창작가들 스스로, 장르를 어떻게 읽고 누려왔는지 이야기하고 생각의 흐름과 운동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식으로 ‘역사 다시 쓰기’가 선행되어야 연대가 가능해진다. 공감할 수 있는 역사의식, 철학, 문화사의 흐름 등이 문화적 동질감을 낳고, 거기서부터 연대의식이 싹틀 수 있는 것이다. 장르를 어떻게 써왔는지를 쓰는 것이야말로 장르를 자신의 눈으로 재발견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며, 장르를 재탄생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품어내는 첫걸음이다.
역사를 잃은 연대는 맹목적이다. 뿌리 없는 연대는 세를 과시할 뿐이다.
연대 없는 역사는 힘을 잃는다. 관계하지 않는 역사는 비명으로 그칠 뿐이다.
갇히지 않고 뚫고 나와 소통하는 문화는 저절로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이로부터 비로소 이식이 아닌 창조가 나온다.

20120215

유로스, 격월간 『녹스앤룩스』 제1호, 녹스앤룩스, 2012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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