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3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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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 박훈정과 나홍진에 대해.

 

술을 마시고 새벽에 혈투를 보았다.

[부당거래]에서도 그랬지만, 박훈정이 계급성을 그려내는 방식은 사실 좀 불쾌한 구석이 있다. ‘귀족’들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열등의식과 분노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실수를 범하는 인물을 과장된 비극적 최후로 퇴장시키곤 한다. 재미 없는 클리셰다. 난 이걸 계급을 이야기하는 세련된 문학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다. 인간적 결점 때문에 장렬하게 몰락하는 인물은, 너무 전형적으로 장엄해서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복수는 무엇에 대한 복수란 말인가? 인물이 증오하는 대상은 결국 개인으로 귀결하고 시스템에 대한 성찰은 공허한 악의 심연에 어느새 가려져 버린다. 그의 각본들이 어느 순간 갈피를 못 잡고 헤메는 것은 이 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근사(가까운? 멋진?)한 현실감각은 근사한 비극의 배경이 되어주지만 관객의 시야마저 어둠 속에 갇히게 만든다. 

 

실은 이러한 결점을 나홍진도 갖고 있는데, 나는 나홍진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 편이다.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둘의 작품을 대하는 내 태도의 차이는 인물의 디테일한 텍스처에 있는 듯하다. 나홍진의 인물들은 먼저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보인다. 자포자기의 순간에서도 인물이 꿈틀댈 때면, 다시금 이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가 있고 그 배경 속에 더러운 세상을 기어다니며 살아가는 사람이 보인다. 허나 박훈정의 인물들은 강렬한 의지가 있음에도 그 의지가 ‘생’에 대한 의지로 표출되지 않고 ‘권력’과 ‘분노’의 의지로만 보인다. 그러한 의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무채색의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홍진의 단역들이 거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박훈정의 단역들은 그냥 무대 소품처럼 보인다.

이 차이를 나타내는 단적인 예로 ‘음식’이 있다. 당장 살기 위해 음식이 필요한 순간에, 음식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태도에서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한쪽은 투정하거나 엎어버리고, 한쪽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시선차이일 것이다.

 

나홍진의 비극은 신파지만 총체적 세계 속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의 인물은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에서 탈주하려 하는, 탈주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열린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최후까지 퍼덕이고 결국 쓰레기가 되는 육신까지, 인물은 처절히 진동하고 요동한다. 자연적 비극이다.

박훈정의 비극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술적으로 설득하는, 묘하게 인공적으로 짜인 무대 속의 장엄한 연극이다. 그의 인물은 애시당초 탈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선 무대 안의 그늘과 그림자만이라도 어떻게든 없애려 든다. 그러나 빛 한줄기가 들어가면 어둠은 두겹 세겹으로 쌓여 동선을 조여온다.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인물과 무대는 박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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